고마운 너에게

by 영원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다다익선”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알고 난 이후로 무조건 많은 것은 좋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정이든, 사랑이든, 사람이든, 많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많이 주고 많이 받고 싶었다. 나는 그랬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건 열네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어색한 교실, 어색한 사람들 모두 나에겐 새로운 것들이었다. 그 교실에 앉아있던 너희들도 하나같이 어색한 모습이었다. 딱 맞지 않고 큰 교복, 아직 젖살이 채 빠지지 않아 포동포동한 얼굴, 그때의 너희들은 순수했고 순수했기에 아름다웠다.


“열다섯” 우리는 어색한 일 년을 흘려보내고 어느새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나름대로 일 년이 지났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과 뻔뻔함이 너희들을 감싸고 있었다. 아직 내 눈에는 빛나던 너희들의 눈빛이 선한데, 너희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빛은커녕 반들반들한 껍데기에 취해있었다. 치마를 짧게 줄이고, 입술에 진한 색이 물들기 시작하며 너희들은 변해갔다. 술을 하거나 담배를 피우기도 했다. 그때의 너희는 무슨 심정이었을까? 어쩜 하루 만에 마음을 바꾸고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는 걸까. 열다섯 살의 너희들과 나는 어딘가 달라 보였고, 유독 반짝이던 너의 눈동자도 어느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서기를 좋아하던 너는 여전히 한결같았다. 유난히 소심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던 나는 그런 네가 좋았고, 든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너의 눈동자에서는 분명히 빛이 나고 있었다. 나는 네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순간을 직접 목격했다. 너의 빛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말이다.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였을까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속이 깊고,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하고,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봐온 너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랬던 너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환청이 들린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나 요즘 00 이가 짜증 나. 너무 싫어

방금 전까지도 00 이와 웃으며 놀던 너를 봤기에, 너의 말은 더욱더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같이 있던 너희들도 놀라 모두 토끼눈을 하고 있었다.

-왜? 00 이가 뭐 잘못했어?

-아니, 그냥

-...

-그냥 짜증 나잖아.

너희들과 나는 짜기라도 한 듯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고, 너는 그렇게 우리에게 폭언을 던진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그냥”이라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의 입에서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너에게 참 많이 의지하고 너를 참 좋아하던 나였지만 아직도 너의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뻔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왕따”가 우리 반에서도 시작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의로운 너의 곁에서 정의롭게 사는 법을 배워왔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고 살라는 너의 장난스러운 말들이 내 뇌에는 또렷하게 박혀 있었으니까. 너도 내 소중한 친구였지만, 00 이도 나의 소중한 친구였다. 나는 처음으로 너와 다른 길을 가기로 선택했다. 모든 순간 함께했던 너를 떠나 네가 가르쳐준 정의로운 사람으로서, 외면당하는 00 이에게 가는 것을 선택했다.

이튿날, 온갖 다짐을 하고 교실로 들어선 나와 00이었지만, 너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00 이가 걱정되어 종일 내 시선은 00 이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자꾸 내 시선에 네가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00 이의 욕을 하던 네가 00 이와 함께 웃고 있다니 어딘가 모를 긴장감에 휩싸여 있던 나는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그때 왜 몰랐을까, 내 마음이 놓인 순간 너도 내 손을 놓았다는 것을. 00 이와의 웃음이 날 비웃는 웃음이었다는 것을.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처럼 나를 아껴주던 너의 모습은 그날 이후로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리석던 그때의 나는 너를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몇 날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고 슬픔에 잠겨 있었다. 네가 뭐라고, 너는 내 손을 놓았을 뿐 아니라 나의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갔다. 00 이도 곧 너의 손을 잡았고 난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땐 너무 늦었는지 까만 하늘만이 날 비추고 있었다. 마치 나를 비웃는 듯했다. 네가 없는 삶은 너무나 어색했고 네가 없는 나의 일상은 어딘가 허전했다.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너희들이 떠올리지 못할 시간만큼 나는 그 까만 하늘 속에 갇혀 지냈다. 너를 잃은 후의 상실감과 공허함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열다섯 살의 나는 그저 사과하고 슬퍼하고 자책하고 후회하고... 이것을 반복하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나는 바보였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어느 정도는 맞나 보다. 너와의 헤어짐 이후 한 달이 다 되어 가던 어느 날, 나는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기만 했던 너와의 악몽을 다시 꺼내 보았다. 네가 없는 그 시간 동안 나는 생각보다 잘 살고 있었고, 나름 더 탄탄한 마음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슬픔과 애석함으로 가득 차 있던 너에 대한 마음은 곧 “화”로 바뀌었다. 너에게 미련을 갖고 있던 나에 대한 화인지, 너에 대한 화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너에게 상처받았던 나이기에, 나의 화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도 정의를 따지던 네 덕에 나는 정말로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갔고, 그냥 너 같은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면 무지무지 아플 줄 알았지만, 막상 아픔을 견뎌내고 보니 내 발등은 더 단단해져 있었다. 너와의 악몽이 이제는 길몽이 되었고, 나는 내 밝은 앞날을 향해 나아갔다. 너의 빈자리로 인해 나는 더 당당해졌다. 너는 네가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겠지? 안타깝게도 나는 네가 없는 덕에 소심했던 성격도 바뀌었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네가 알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힘든 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힘들 때면 너와의 찢어진 추억을 상기시키며 의지를 다졌다. 난 너도 이겨낸 사람이니까, 난 생각보다 단단한 사람이니까. 돌이켜보면 난 너와의 헤어짐 이후로 너무나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게 다 네가 내 인생의 길몽이 돼주어서 그런 것 같다. 이제는 네가 그립지도, 싫지도, 밉지도 않다. 그저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고마워.


22년 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