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집을 찾아서

인형의 집을 읽다가 든 생각

by 영원


“나는 우선 나 자신에게 충실해야 해요. 나는 아내이기 전에 인간이에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서 노라가 남편 헬머에게 남긴 이 말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울린다. 단지 아내, 엄마, 혹은 누군가의 ‘좋은 사람’이기 전에 우리는 모두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다. 노라는 오랫동안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오다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인형의 집을 떠난다. 그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문득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 또한 사람들에게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억누르며,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내 마음을 외면한 채 살아온 시절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타인에게 사랑받는 법만 알고, 나 자신을 돌보는 법은 모르는 인형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의 인형 아내였어요, 아버지의 인형 딸이었던 것처럼. 당신은 나를 기분 내키는 대로 꾸미고, 나는 그게 재미있는 줄 알았죠.”


노라가 마지막에 남편에게 남긴 이 말은 내 과거를 마주하게 만든 구절이었다. 나도 한동안 사람들의 기대에 나를 끼워 맞추며 살아왔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분위기를 깨기 싫어 내 의견을 삼킨 적도 많았다.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반응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고, “착한 사람”, “잘 맞춰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일상이었다. 혹시 실망시키거나 거절당할까 봐 마음을 졸인 시간도 많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나는 점점 내 감정을 잃어갔다. 내 마음보다 남들의 눈치를 먼저 살피는 습관은 점점 익숙해졌지만, 동시에 나를 조금씩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외로웠고, 늘 친절하게 행동하면서도 속은 답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며 나 자신의 모습을 꾸미고 눌러왔던, 스스로 만든 인형의 집 안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는 다정하고 원만해 보였지만, 그 안엔 두려움과 불안으로 꽉 찬 내가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어요.”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책을 읽다 보니, 이 구절이 내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노라가 스스로를 위한 결단을 내렸듯, 나 역시 한 번의 ‘뜻밖의 거절’을 계기로 삶의 변화를 맞이했다. 나에게 매우 중요했던 대회에서, 친구가 내 아이디어를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평소와 달리 단번에 “안 돼”라고 말했다.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무의식 중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결과 나는 그 대회에서 1등을 수상했다. 이 경험은 내게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그동안 타인에게 맞추느라 거절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맞춰주는 것이 미덕이라 생각했고, 내 욕구와 감정은 뒤로 미루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내가 원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거절’이라는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나를 깊이 흔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거절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작은 일부터 “아니요”라고 말하며, 내 마음을 먼저 존중하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위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키우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거절을 연습할 때는 정말 두려웠다. 나는 항상 친절하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했기에, 거절은 내 성격과 어긋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사람들은 거절을 잘하는 나를 오히려 더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한 친구는 “너 그동안 너무 착하게만 살아서 보는 내가 다 답답했어. 이렇게 사니까 더 행복해 보여.”라는 말을 해주었다. 거절에 익숙해지며 나는 깨달았다. 거절을 상황과 때에 맞게 사용할 수 있다면, 나도 손해 보지 않고 상대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동안 내가 두려워했던 거절은, 생각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건강한 소통의 방식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점점 더 융통성 있게 거절하는 법을 익혔고, 덕분에 내 삶은 이제 더 이상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지금은 거절을 어려워하는 친구들에게 내 경험을 들려주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을 함께 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그들도 두려워하지만, 결국 자신을 지키는 일이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는다. 나 역시 이제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 삶을 변화시키는 데 있어 ‘거절’은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였다고.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결국 자신의 ‘인형의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오랫동안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오다 결국 자신을 잃은 그녀는,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스스로를 위한 삶을 살기로 한다. 내가 겪은 변화도 그와 닮아 있었다. 거절은 내게 두려움이었지만, 동시에 자유와 자아를 찾아가는 열쇠가 되었다. 노라처럼, 나의 첫걸음도 ‘작은 거절’에서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 결코 이기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인의 기대와 요구에만 맞춰 살다 보면 결국 자기를 잃게 되고,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바로 그 고정관념을 깨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지 않기 위해, 필요할 때 ‘거절’을 선택하며 나를 지켜나간다.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에게도 ‘거절’을 연습해 볼 용기를 나누고 있다.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은 분명 두렵고 때로는 외롭기도 하지만, 그 끝에는 진정한 자유와 나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노라처럼, 나도 이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25년 여름과 봄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