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다닌 직장을 퇴사하고 첫 번째 이직을 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으로 아주 큰 결심을 했다.
9년 다닌 첫 직장의 편안함과 안정감을 내려놓는 것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실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모든 부정적 가능성을 안고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나에게 실패할 가능성이라는 건 새 직장에서 1년을 못 버티고 나오는 것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알았다.
여기는 나랑 맞는 곳이 아니라는 걸.
맞지 않는 부서, 직무, 워라벨이 안 되는 환경까지
금요일에 첫 출근하고 주말에 정말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냥 도망칠까?
진짜 울며 겨자 먹기로 10개월을 버티고, 더는 아닌 것 같아서 부서이동을 신청해놨다. 그리곤 우울의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나를 괴롭혔다.
- 넌 왜 남들처럼 무던하지 못해? 일 좀 안 맞아도 돈 벌어야지, 뭐가 그렇게 까탈스러워 - 어린애도 아니고 아직도 니가 적성 따질 때가 아니잖아 - 먼 미래를 봐야지, 눈앞에 하기 싫은 일 때문에 퇴사까지 생각하면 좀 어리숙하지 않아? - 그래도 난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고 싶어, 돈은 좀 덜 벌어도 좋아, 하기 싫은 건 안 하면서 스트레스 덜 받으면서 살고 싶어.
이런 마음과 머리의 싸움이 지속되길 두 달째, 집에 들여놓은 화분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선물 받은올리브나무가점점 말라가더니 결국 한 달이 안되어 죽고 말았다. 죽어가는 것이 보일 때 살리기 위해 가지치기도 해주고 물 주기도 바꿔봤다가 위치도 요리조리 옮겨주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었다.
정성을 다해도 새잎을 보여주지 않는 올리브나무에게 너는 왜 이렇게 까다롭냐고, 뭐 이리 키우기 힘드냐는 불평의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우리 집 환경과 잘 맞지 않는구나 싶었다.
나를 탓하지도 식물을 탓하지도 않았다. 반면 우리 집에 자리를 잘 잡고 계속 큰 잎을 내어 주고 있는몬스테라도 있다. 그들은 그들의 자리에서 묵묵히 잘 있어 주었다.
최근에는 블루스타라는 고사리 화분을 들였는데 은회색을 머금은 잎사귀가 너무 매력적이다. 고사리과는 공기 중에 수분이 많고 축축해야 잘 큰다고 했는데, 그런 조건 환경이 딱 맞아떨어지는 곳은 바로 화장실이었다. 하지만 예쁜 식물을 화장실에 두기가 아쉬워서 주방 식탁 위에 가져다 놨다.
처음에는 잘 적응하는 듯하다가 잎이 점점 말르고 갈색으로 변색되어갔다. 물 주기를 좀 더 자주 해주었는데 큰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한번 화장실에 가져다 놔봤다.
어제 퇴근하고 샤워하면서 그 식물을 바라보는데 여러 가지 마음이 들었다. 그 아이는 다시 본연의 매력적인 잎색을 보여주며 힘이 딱 들어가 있었다. 주방 식탁에서 봤던 축 처지고 갈색으로 비실비실하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남편도 인정했다. 이 화장실이 이 아이의 자리인 것 같다고.
문득 나는 몬스테라가 아니고 고사리인데 왜 아무데서나 잘 적응하지 못하냐고 스스로에 핀잔을 주고 있던 건 아닐까,
나는 계속 몸에서 물이 더 필요하다고 적합한 자리로 옮겨달라고 지속적으로 나에게 말하고 있는데, 무시하고 나와 맞지 않는 자리에 이 자리가 좋으니 일단 견뎌봐, 남들은 다 좋은 자리라고 하는데 넌 왜 못 거티니, 왜 이렇게 까탈스러워하며 핀잔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닐까 가 아니라 그게 맞다.
우리 집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난 유칼립투스와 올리브나무에게 나는 그 어떤 비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현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려는 나를 비난하고 있다.
나는 몬스테라가 아니다. 나는 올리브 나무고, 고사리다. 나에게 좀 더 맞는 환경을 제공하고 내 마음을 내가 따라준다면 나도 우리 집 고사리처럼 더 예쁜 잎을 보여줄 수 있겠지.
"나는 몬스테라가 아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다. 아니 나는 평생 내가 몬스테라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몬스테라처럼 되고 싶어서 "너는 어떤 상황, 환경에서도 잘 적응하고 쉽게 포기해선 안돼. 예민하게 굴지 좀 마, 다른 사람들처럼 좀 덤덤해봐"라고 주문을 외우고 스스로를 고문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