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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씨 Apr 18. 2023

이름에게

영화 <윤희에게>

 가끔, 아주 가끔 이름을 가진 이보다 그의 이름이 큰 몸집으로 내게 다가올 때가 있다. 끝난 걸 알면서도 현재는 이곳에 머물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이미 서로 다른 곳에 있는데 한 순간 들려온 이름에 우뚝 발길이 멈추는 것처럼. 존재가 아닌 이름 석자에 울고 웃었던 날들. 그 이름이 거대한 그림자가 되어 매일 밤 나의 어둠을 잠식해 오던 날들. 그때의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당신이었을까 아니면 그 이름이었을까.


 ‘윤희’라는 이름의 등장인물은 몇 없어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비슷한 어감의 이름만 들려도 반가웠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연예인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이유 없이 관심이 갔고 조건 없이 응원하게 됐다. 그와 그녀의 삶을, 막연한 행복을 바라며 함께 울기도 했다.


 평소 영화를 고를 때면 줄거리보다 제목과 표지에 집중하게 된다. 열에 여덟은 나의 선택이 옳았다며 제목을 곱씹으며 집중했고, 둘은 화자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처럼 감독의 심오한 예술 세계에 감탄했다. 명확한 기준은 없고 그냥 끌리는 걸 본다는 이야기이다. <윤희에게>는 제목부터 손이 가지 않을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전화하며 걸어가는 행인 1 혹은 주인공 친구 3 정도가 아닌 자기주장 강하게 쓰여 있는 나의 이름이라니. 더불어 김희애 배우가 주연이라니 더욱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한겨울 속에 서 있는 두 여인의 모습. 누군가의 필체로 쓰인 윤희라는 이름. 어쩐지 영화 속 나열된 장면 중 하나가 꼭 나를 울릴 것 같았다. 줄거리도 모르면서 윤희의 인생 중 단 한 장면도 보지 못했으면서 감히 슬픔을 헤아려봤다.


 영화는 ‘윤희’에게 쓰인 한 편지로부터 시작된다.


윤희에게
잘 지내니? 오랫동안 이렇게 묻고 싶었어. 너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벌써 20년이 지났으니까. 갑자기 너한테 내 소식을 전하고 싶었나 봐.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지 않니? 뭐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질 때가.


 편지의 봉투를 뜯은 이는 윤희의 딸 새봄이었다. 발신인은 일본에 살고 있는 쥰. 그녀가 참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우정을 뒤로한 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윤희와 쥰의 만남을 새봄이 성사시킨다. 일본에서 전해온 편지로 인해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마주하기까지 영화는 담담하게 윤희의 삶을 나열하고 있다. 손목이 시린 줄도 모르고 일을 하러 나가는 윤희와 그녀를 조금씩 알아가는 새봄의 이야기. 첫사랑의 아린 마음은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속에 영영 파묻히지 못한다. 그녀의 사랑이 무슨 모양을 띠고 있든 잠시나마 행복을 바라고 싶었다. 그 인물이 ‘윤희’가 아닐지라도 이름을 지닌 그의 인생을 응원하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순간 두 여인의 표정은 제각기 다른 형태로 움직인다. 그날 저녁 서로가 나눈 대화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지만 스무 해의 그리움이 확신으로 물들기엔 충분했을 것이다.


 ‘윤희’는 영화 속에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아도 새봄을 걱정하며 그녀를 응원하는 엄마의 사랑. 이혼한 남편이 재혼 소식을 알리며 청첩장을 건넬 때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행복을 바라는, 우정이라 하기엔 무겁고 그 어딘가 걸쳐 있는 사랑. 첫사랑, 쥰을 향한 사랑까지. 사랑은 단 하나의 이야기에만 머물 수 없고 머물지 않는다.


 윤희라는 이름으로 묶인 수많은 이름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게 된다. 답이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이곳에서 당신의 안부를 묻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의 위로를 얻기를 바라면서. 녹지 않고 쌓여가는 눈 속에서 우리의 아픔이 한없이 묻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쓰린 추억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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