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초코를 좋아해

고민은 칼 같은 바람일 뿐이야

by 고사리



뙤약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작고 소중한 선물이 찾아왔다. 검고 반짝이는 두 눈에 하트 모양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코, 초콜릿처럼 달콤한 윤기를 자랑하는 복슬복슬한 털이 유독 돋보이는 강아지였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초코야'

내 멋대로 지은 이름에 동생은 길길이 날뛰며 '얘 이름은 치킨이야'라고 소리쳤다.

'아니야 초코야 나는 초코를 좋아해' 나는 낮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내 평생 장녀라는 이름하에 모든 것을 양보하며 살았다. 살면서 한 번쯤은 내가 원하는 걸 양보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게 비록 강아지 이름을 지어주는 일 일지라도 말이다. 단호한 내 대답에 동생은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에 의견을 체념하곤 곧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초코는 사람만큼이나 똑똑하다. 어느 부모가 태어난 아기를 두고 엄마보다 아빠를 먼저 부르기 시작하면 '우리 아기는 정말 천재인 것 같아'라고 느끼는 것과 비슷한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만큼 똑똑한 강아지인 건 확실하다.


어느 날 나는 일과 관계에 지쳐 방 안에 앉아 혼자만에 생각에 잠겼다. 초코는 잠시 동안 두리번거리더니 자기가 가장 아끼는 간식을 내 앞에다 물어다 놓고는 앉아 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치 '인간아 이거 먹고 기분 풀어 내가 제일 아끼는 강아지 껌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에 양 팔 가득 초코를 껴안았다. 밥 먹듯 새어 나오던 나의 한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사라지고 말았다. 걱정을 내려놓는 일이 숨 쉬듯 별거 아니라고 느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불면증이 도진다. 숨 쉬는 게 느껴질 만큼 크게 심호흡을 해야만 그나마 안정되었다. 취업을 하고 나서는 내가 살아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일 집 일 집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졌다. 온전히 나로 사는 건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뿐이었다.

단순히 잠에 들기 아까워서 잠에 들지 않았다. 그럴 때면 귀신같이 총총 거리는 소리를 내며 초코가 다가왔다.


'인간아 또 안 자고 뭐해'라고 말하듯 이불을 두세 번 차내 더니 이내 옆에 누워 살아있는 수면제를 자청했다. 그런 초코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떠오르는 잡념들을 하나씩 지워냈다. 지구는 45 억년 간을 돌고 돌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데 비록 쳇바퀴 같은 삶이지만 어딘가에 내 터전 하나는 만들어지고 있지 않을까 애써 나를 위로하며 잠을 청했다.





20대 후반에 접어든 뒤로는 출근을 하면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갑자기 온몸이 아프고 힘 없이 나른해지는 일이 최근 들어서는 자주 발생했다.


근무 중 쉬는 시간에 잠시 체력을 채우려 의자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앉아 있으면 주위에서는 하나둘 한 마디씩 던진다. '젊은 애가 벌써부터 그렇게 체력이 약해서 어떡하니', '운동 좀 해', '영양제 좀 챙겨 먹어 나중엔 먹어봤자 소용도 없어' 맞는 말이지만 잔소리처럼 들렸다.


게임 캐릭터도 오래 싸우면 HP가 떨어지는데 나도 세상과 싸우느라 잠시 체력이 소모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혼자서 아무도 듣지 않을 생각만 되풀이하던 중 친구에게서 메시지 한통이 왔다. '당 떨어질 때 먹어 내 특급 처방전이야' 친구의 특급 처방전은 다름 아닌 초콜릿이었다. 곧장 편의점으로 달려가 처방전을 초콜릿과 맞바꾼 뒤, 포장을 뜯어 입안 가득 집어넣었다.


그래 역시 초코야


나에게 필요한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위로나 잔소리 따위가 아니다. 그저 묵묵히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게 친구인지 초콜릿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초코를 좋아한다. 그게 동물이건 음식이건 중요하지는 않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아무렴 상관이 없다.


추운 날 든든하게 껴입은 패딩 하나가 매서운 찬 바람을 막아준다. 나에겐 그것들이 패딩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칼 같은 바람에도 막아줄 방패가 존재한다면 언제든지 맞설 준비가 되어있다. 삶이 비관적으로 보일 때 숨어 있는 패딩을 찾아보는 것도 일종에 방어책이 될 수 있다. 비록 명쾌한 해답을 알려주진 않더라도 시나마 쉬어갈 곳 한 군데는 생길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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