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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l 12. 20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 신혼집 계약은 당일치기

거짓말처럼 제주에 신혼집을 계약했다. 원래 더 여유를 두고 에어비엔비에서 지내며 천천히 구하려 했던 계획이 갑자기 변경되었다. 새로운 미션을 세워 일주일간 온라인으로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제주스러운 집보다는 여러모로 처음 적응하기에 편리한 제주시 시내의 풀옵션 전셋집을 최대한 찾았다. 그리고 토요일 당일치기로 나와 남자친구, 그리고 어머니들과 함께 제주로 떠났다.


하지만 역시나 인생은 변수 천지. 부동산을 거쳐 총 4곳을 가보려고 했던 계획은 당일날 예고 없이 바뀌었다. 첫 번째로 보려던 집은 작은 집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예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는데, 어제 계약이 되었다는 연락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무리는 해야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던 두 번째 집을 바로 보러 갔고 곧바로 계약하게 되었다. 이게 정말 가능하다고? 당일날 집을 둘러보고 감사한 마음으로 계약을 진행하면서도 너무 얼떨떨하고 혼란스러운 여러 가지 마음이 쏟아졌다. 너무 좋고 너무 감사한데, 우리는 모아둔 돈이 없었다. 결혼식도 계획 아래 준비를 시작한 게 아니라서 그나마 있던 재정과 매달 버는 월급으로 벼락치기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께 손을 벌려 제주에 신혼집을 얻는 게 참 염치가 없었다. 송구하고 면목이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이렇게 받아도 되는 건지. 처음엔 원래 다 어려운 거라며 도와주신 부모님들께 감사하며 예상치 못한 계약 진행에 놀란 마음에 오후 내내 눈물이 계속 났다. 그저 평생 감사를 잊지 않고 앞으로 열심히 벌고 모으며 잘 살아야지 다짐 또 다짐했다.


제주는 어떤 목적으로 오는 거예요?

살아보고 싶어서요. 어떤 일 하려고요? 어떤 일이든 해보려고요. 부동산 공인중개사 분이 여쭤보시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게 전부였다. 정말 별다른 목적도 대단한 계획도 없었다. 그저 어차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타이밍이라면 나는 평생을 함께 할 사람과 오랫동안 익숙했던 것들을 훌쩍 떠나 제주에서 새로이 시작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뿐이었다. 물론 이 거대한 전환,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분명 우리에게 좋은 날을 가져다 줄 거라고, 다시는 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정말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잘 한 결정일까? 별 생각이 다 들면서 피로감이 쏟아졌다.


제주에서 큰 일을 잘 마치고 돌아왔지만, 나와 남자친구는 꽤 예민했다. 우리는 감사함도 잠시, 다음 날 또 다투었다. 나의 말이 그에게 거슬렸고, 그의 말이 내게 거슬렸다. 어쩐지 같은 편이 아니라 정반대에 서있는 사람들처럼 비난했고 상처를 받았다. 마음은 다시 혼란해지고 요동쳤다. 결혼은 무엇인지,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나의 세계를 어디까지 포기하고 찣어내야 하는지 다시 자신이 없었다. 결혼까지 가기 위해선 연애할 때와는 또 다른 더 넓은 영역까지 내어줘야 했고 나의 본성은 더 깊이 변해야만 했다. 그래,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이다. 결국 사랑해도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을 테고 평생 받아들이고 조율해가야 할 테다. 처음으로 결혼이 이만큼의.. 이 정도의 일이구나 느꼈다. 자신 없다는 말이 입에서 계속 나왔고 그간 좋았던 마음과 기대,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래도 되는 걸까? 정말 결혼,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아가려 한다. 걸어보려 한다. 사랑하려 한다. 하루 걸러 하루 다투는 요즘이라 우리는 지쳐있었지만, 다시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뉘우쳤다. 그렇게 이번 일은 지나갔지만 머지않아 또 싸울 것만 같아 대책이 필요하겠다고 고민하던 순간. 그는 우리 연애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존댓말을 쓰겠다고 했다. 연애 초반에 우리는 아직 친하지 않아서 존댓말을 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친밀해지고 편해지니 서로 반말만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표현이 가벼워지고 쉬워졌고 함부로 대하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제일 친하다는 이유로 제일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데. 그렇게 우리는 어렵고 웃기지만 존댓말을 사용하기로 했다. 연애 초 우리가 자주 말하곤 했던 봄밤의 정인과 지호처럼. 서로를 사랑하지만 존중하면서 다치지 않게, 실수로 인해 더 멀어지지 않게.


아, 그래도 참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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