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 열린책들, 민음사가 번역한 세계의 고전.
짐(Jim)은 위기 상황에서 배를 버리고 탈출한 항해사다. 배는 당연히 침몰했을 줄 알았고 같이 탈출한 사람들끼리 말을 맞추기로 했는데 배가 침몰하지 않고 돌아왔다. 그는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 자신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 그것에 발목잡힌 짐은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고 괴로워 하고 정신 못 차리고 산다. 그런 그를 붙잡아 주는 건 이 소설의 화자인 말로(Marlow)다.
짐보다 인생 선배인 말로는 짐을 보고서 이 젊은이가, 저렇게 괴로워 하는 양심과 꿈을 가진 젊은이가 망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가 비겁자이자 볼품없는 팔푼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본다. 그는 짐의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일자리도 알아봐주고 말 그대로 그를 ‘믿어준다.’
짐을 살려낸 것은 이 믿음이 아니었을까. 그 덕분이다. 짐은 파투산이라는 벽지로 들어가서 드디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어낸다. 그곳에서 부족 간의 다툼과 분쟁을 해결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우뚝 선다. 이전의 과오는 씻은 듯이. 말로가 파투산에 방문했을 때 의기양양해 하는 소년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괜찮은 여자와 연애도 하고.
그러나 그 세계에 브라운이라는 신사가 들어왔을때 짐은 다시 한번 위협받는다. 짐의 세계는 결코 안전하지 않았던 거다.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는 세계를 피해 이 벽지로 들어왔는데, 자신의 과오가 있는 세계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다니.
게다가 그는 마치 이전에 자신이 저질렀던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브라운은 짐에게, ‘살기 위해서 뭐든 못하겠소, 나를 한 번 봐주시오’라고 애원하고 마니까. 짐은 많은 부족 장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놓아주기로 하고, 브라운은 짐과의 약속을 어기고 일대 소란을 벌이고 나가는 와중에 짐의 친구이자 파투산을 이끄는 부족의 아들을 죽인다.
이전에 배를 버리고 재판정에 홀로 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짐은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맨 몸으로 혼자 부족민들에게 간다. 그는 죽는다. 말로는 이 이야기를 전하는 글의 끝에서 묻는다. ‘그는 만족했을까?’ 라고.
나에게는 짐이라는 이 인물이, 끝내 자신에게 꿋꿋하게 정직했던 이 인물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건, 스스로가 얼마나 비겁하게 여겨지고 볼품하고 초라하게 여겨지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곁에 있어주던 말로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생각하면, 말로와 짐이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It is certain my Conviction gains infinitely,
the moment another soul will believe in it.
LJ의 제문이자 노발리스의 시구. 이 글은 길고 긴 시간을 지나서야 쓸 수 있게 된 ⟪로드 짐⟫의 감상문. 이제까지의 삶에서 나의 가장 사랑하는 책 중 한 권.
옥스퍼드 판본의 앞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