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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준영 Jan 06. 2023

2013년 12월

-유아적 잔혹함에서 비롯된 비웃음에 나는 또다시 쉽게 흔들려 버렸고, 이내 귀와 머리가 연결된 주름 잡힌 그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귓불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눈을 뜨니 가슴이 무엇에 눌린 것 마냥 무겁다. 목구멍을 열고 가능한 많은 공기를 가슴속에 밀어 넣지만 숨은 폐에 닿지 않고 목젖 뒤에서 방향을 잃은 채 몇 바퀴 돌면서 이내 사라진다. 침대에 파묻힌 듯이 몸은 무거웠고 세탁 주기를 넘어선 매트 커버를 뚫고 나온 땀과 각질 등이 섞인 메모리폼 가루들이 숨을 쉬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미세하지만 격렬하게 들썩이는 듯했다. 좋지 못한 기억과 감정이 잠자리를 함께 했다. 엷은 땀 내음이 콧속을 채웠다. 진하게 남아있는 감정들은 나른함과 무력감으로 나 이외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공기청정기가 내는 건조한 소음에 멍하니 귀 기울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요즘 인기 있다는 인문학자의 책에서 읽은 문구를 되뇌며 오늘 할 일을 확인한다.

‘비굴함이 지나가면 당당함이 다가온다.’

가진 것이 없는 자가 처음부터 당당하면 부러진다는 이야기와 함께 나온 문장을 되뇌며 삶을 유연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다시 한번 상기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문장에 천착하는 것이 기회주의 혹은 결과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반론을 제기한다.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의심과 의심이 돌고 있는 중 유리컵을 스피커 삼아 담아둔 핸드폰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온다. 다음에 재생될 노래도 매우 좋아할 뿐 아니라 두 곡간의 분위기 및 연결성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독특한 무드가 완성된다. 이내 좋아하는 노래가 주는 즐거움과 두 곡의 연결이 주는 생경한 리듬감 사이를 저울질해본다. 그리고 독립적 작품 사이의 미묘한 연결성이 주는 재미에 대해 생각하지만 딱히 결론을 내리진 못한다.


-“이 병을 경험한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점은 소리가 나에게만 들린다는 것과 소리 나는 것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것 두 가지입니다.” 의사는 검지와 엄지를 차례로 접으며 나에게 설명했다.-


 최근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반복되어 5개월 만에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반년이 조금 넘게 상담을 받았기에 간호사에게 친근하게 눈인사를 하고 제 집에 온 냥 능숙하게 둥굴레차 티백을 뜯고 따뜻한 물을 붓는다. 이전 환자의 상담이 아직 끝나지 않은 관계로 연녹색 패브릭 소파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조지아 오키프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꽃그림이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고 커피 테이블과 액자에 당당하게 박제되어 있는 의사의 화려한 경력들은 정신과적 질환에 시달리는 이들의 간절함을 달래고 있다. 간단한 상담을 마치고 몇 가지 약을 처방받았다. 자낙스, 졸피뎀으로 명명된 분홍색과 연보라색을 띤 알약들을 바라보며 자낙스가 줄 나른한 안도감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몫을 스스로 이겨내지 못하고 약물에 취한 개운하지 못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열패감이 고개를 든다. 열패감은 나른한 안도감을 상상하며 감정적 이완을 즐겼던 자신을 경멸하기 시작했고 나는 자기혐오의 잠식을 피하기 위해 자존감의 추락이 낳는 수동적 삶을 상기하며 몸을 움직였다.


  전시 철수를 위해 충무로 역으로 향했다. 원효대교를 지날 무렵 조수석 쪽 와이퍼에서 휘리릭 휘리릭 소리가 나는 것을 느꼈다. 모든 글자가 보이지 않아도 오른쪽 와이퍼에서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종이에 쓰여 있는 문구를 알 수 있었다.

‘중고차 무조건 삽니다. 최고가 매입! 최저가 판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와이퍼를 좌우로 연속해서 흔들어 보지만 와이퍼 고무에 꽉 낀 체 조롱 섞인 소리를 쏘아댔다. ‘브레이크 마모율 25% 이하, 극히 양호’라는 검사결과를 상기해 보았지만 전단지가 내는 소리는 나에게 중고라는 판단을 강제하였다. 어느새 차는 원효로와 한강로의 페인트 벗겨진 낡은 건물들을 지나 빛바랜 서울역 고가도로를 향하고 있었다.

서울 스퀘어 미디어 캔버스를 바라보며 30년도 더 된 고가도로를 지나갔다. 고가를 지나던 중 최근 계속되는 위통 때문인지 혀뿌리가 딱딱해지는 느낌과 함께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나는 혀를 길게 빼고 두툼한 뒤쪽을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리고 이내 거뭇거뭇한 도로를 지나 무심하게 퇴계로로 진입한다.


-양쪽에 눈가리개를 한 것 마냥 시야는 좁아졌다. 멈추려고 해도 관성 때문에 고개만 갸웃거릴 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창문이 망가졌는지 틈새로 어둠은 계속 흘러들어 왔고 언제부터 또 비가 왔는지 발은 점점 축축해졌다.-


 태어나서 딱 한번 가보았던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호텔 1층에는 현대미술 작가의 설치 작업이 은하수처럼 천정을 장식하고 있었고 집 한 채 값이 쓰인다는 웨딩홀 입구에는 하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신랑과 신부의 이름을 보며 이런 곳에서 결혼하는 그들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가정의 경사를 이곳에서 부족함 없이 맞는 것을 내심 자랑스럽게 생각할 그들의 부모를 떠올려 본다.

 식사는 부족함이 없었다.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던 중 새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스쳐 지나간다. 강렬한 색상과 디테일이 눈에 띄었기에 시선은 잠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그녀가 지나간 곳의 허공에는 원피스와 어울리는 섬세한 향기가 머물러 있었다. 콜타르와 에탄올이 뒤섞인 향기에 잠시 취하며 쥐스킨트의 소설과 타임스퀘어 프라다 매장을 장식한 벤위쇼의 사진을 떠올렸다. 워낙 색상이 강렬했기에 나는 그 원피스를 쉽게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함께 온 남성과 행복한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그의 사랑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의 잡티하나 없는 피부, 각이 살아있지만 두툼한 콧날, 작지만 이지적인 눈매가 짧은 머리와 함께 단정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향기와 아름다운 원피스, 섬세하게 그려진 눈썹, 젊음과 핸섬함에 나는 자연스레 움츠러들었고 이내 의자 위에 무방비하게 올려져 있는 그의 군내 나는 사타구니를 떠올리며 고가도로에서 느낀 메스꺼움을 기억해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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