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든버러, 말을 걸지 않는 도시

굳이 많은 의미를 남기지 않아도

by 포르마


. 1학년 때는 영국인 친구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했다. 영어 실력도 많이 늘고, 지금도 떠올리면 웃음이 나는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결국 모두와 맞을 수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 시간이었다. 국적과 언어를 떠나, 사람마다 갖고 있는 리듬과 성향은 다르다. 아무 말이 없어도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활동을 해도 끝내 깊게 연결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 몇몇 플랫 메이트들은 거의 매일 저녁 공용 주방에서 상의도 없이 파티를 열었고, 그 에너지는 언제나 과했다. 음악이 벽을 타고 울리고, 복도에서는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곤 했다. 처음에는 이것도 문화 차이니까 이해해야 하나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소음과 뒤섞인 기운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나는 훨씬 조용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고, 2학년부터는 학교 외부 사설 기숙사로 옮기기로 했다. 조금 더 프라이빗하고, 조금 더 차분한 곳.


. 브랜드 기숙사는 학교 칼리지보다 가격이 조금 더 나갔기 때문에, 영국 학생보다는 유학생이 훨씬 많았다. 비율로 따지면 중국인이 80%, 인도·파키스탄권 학생이 15%, 영국인이 1%, 기타 인종이 4% 정도 되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플랫 역시 공용 주방을 함께 쓰는 구조였지만, 이번엔 다섯 명이라 공간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중국인 한 명 · 영국인 한 명 · 인도인 한 명, 그리고 홍콩인 친구 찰리(리모와 편 참고)까지. 밤에는 조용하고, 아침에는 각자의 생활이 흐르면서도 서로 크게 부딪치지 않는, 지금 생각해도 그 작은 플랫의 공기가 나에게 더 잘 맞았다.



. 이 주택 단지는 중국인 학생들이 정말 많아서, 나는 이곳을 ‘Little China’라고 불렀다. 덕분에, 중국어를 영어만큼 사용할 수 있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중국인 친구들이 늘어났다. 그들이 사용하는 메신저인 위챗에는 인스타그램과 유사한 모멘트라는 기능이 있는데, 친구들이 업로드하는 게시물들을 보며, 나는 종종 감탄하곤 했다.


. 첫 번째 이유는, 이 친구들이 생각보다 사진에 진심이라는 것이다. 구도·색감·순간을 잡는 감각이 기대 이상이었다. 별것 아닌 일상 사진도 화보같이 찍어 놀라울 정도였다.

. 두 번째 이유는, 영국 곳곳을 정말 부지런히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잘 모를 영국의 작은 해안 마을, 웨일스의 숨은 자연 풍경, 잉글랜드 북부의 소도시들까지. 그들은 내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지역까지 탐험하고 있었다.


. 처음엔 인구가 많으니까 정보도 많고, 금전적 여유도 있어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호기심에 직접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는 왜 영국 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다른 나라 가려면 비자 받아야 하잖아, 너무 번거로워.”


. 그 말을 듣는 순간, 대답보다 내 쪽이 더 선명해졌다. 이 친구들은 ‘나가기 쉽지 않아서’ 영국을 보고 있었고, 나는 ‘나갈 수 있어서’ 영국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뚜렷해졌다. 그동안 유럽 지도만 붙잡고 다음 여행지를 고민하기 바쁠 때,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얼굴들은 거의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데 1년이 걸린 셈이었다.



. 그제야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이 나라에 살면서도, 영국을 여행객의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영국 안에도 요크와 런던과는 또 다른 리듬을 가진 도시들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가능성을 스스로 밀어내고 있었다.


. 그래서 마음을 바꿨다. 멀리 나가는 대신,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나라를 조금 더 깊게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 영국에 왔을 무렵, 3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레일패스를 구매해서 언제가 쓰게 될 것처럼 방치해 놨는데, 비로소 이걸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다. 더럼 대성당 · 뉴캐슬 타인 브리지를 지나, 창밖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고, 공기의 밀도도 달라졌다. 잉글랜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스코틀랜드는 자신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처럼 화려하게,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몇 정거장을 지나자 분명해졌다.


“아, 여기가 에든버러구나.”


. 도시 전체가 소리를 낮춘 채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돌로 쌓은 건물의 색감 · 언덕의 곡선, 누가 봐도 여기가 에든버러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 방식이 아주 조용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멀리 떠나지 않아도 충분히 낯설고 새로울 수 있다는 걸 체감했다.



. 에든버러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사실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감탄하거나, 메모해두고 싶은 문장이 생기지도 않았다. 그저 걷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지도를 켜지 않은 채로,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골목을 틀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무언가 기록해야 할 것 같다는 압박도 없었고, 이 여행이 헛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걷는 속도가 나에게 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 언덕 위에 자리한 에든버러 성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평소의 나였다면, 언제 다시 오겠냐는 마음에 성 내부까지 둘러보고 나서야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나 역시 더 다가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 어떤 도시는 계속 말을 건다. 여기 좀 봐달라고, 이건 꼭 느껴야 한다고. 하지만 에든버러는 나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나 역시 애써 말을 만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마음에 남았다. 이날은 특별해 보이기보다는,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쪽에 가까웠다. 도시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았던 것처럼, 나 역시 옷에게 많은 역할을 요구하지 않았다.



에든버러에서 나는 이렇게 입었다


· 무신사 스탠다드 / 스트라이프 릴렉스 핏 옥스포드 셔츠 (그레이)

면 100%의 옥스퍼드 원단으로 만들어진 셔츠. 조직감이 분명하지만 과하게 두껍지 않아, 가까이에서 봐도 단정한 인상을 주었다. 단독으로 입어도 형태가 흐트러지지 않고, 흰색 바탕 위에 얇게 들어간 그레이 스트라이프는 꾸민 느낌을 내기보다는, 도시의 결을 따라 정돈되는 쪽에 가까웠다.


· The Fabric / Burberry Cloth Cotton Pants (Natural Beige)

일본산 버버리 코튼 원단을 100% 사용한 하이웨이스트·레귤러 핏 팬츠. 밀도가 있는 원단 덕분에 실루엣이 깔끔하게 유지되고, 베이지 컬러는 상의를 무리 없이 받아준다. 언덕이 많은 도시에서 바지는 생각보다 기분을 좌우한다. 몸에 밀착되기보다는 여유 있게 떨어지는 핏이 안정감을 주며, 과하게 힘을 주지 않았어도 이미 갖춰 입은 사람처럼 보였다.


· New Balance / 2002R (White Ivory)

쿠셔닝이 뛰어난 미드솔과 가벼운 착화감의 스니커즈. 에든버러에서는 신발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보다, 풍경을 방해하지 않는 쪽이 좋았다. 예쁜 신발보다 많이 걸어도 투정하지 않는 신발이 필요했다. 화이트 아이보리 컬러는 전체 착장을 캐주얼하게 만들어주면서도, 도시의 무채색 속에 섞여들어갔다.



. 그날 이후로 레일패스는 더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날의 속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리듬으로 이동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졌다고 느꼈다. 여행이 꼭 멀리 갈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굳이 많은 의미를 남기지 않아도 잘 다녀올 수 있다는 걸 이 도시는 조용히 알려주었다. 무언가를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고, 특별한 장면이 없었다고 이 여행이 덜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잘 걷고, 잘 먹고, 잘 머물고, 필요 이상으로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던 하루. 이 여행은 그렇게, 그 자체로 충분했다.


. 그 이후의 영국 여행들은 모두 조금씩 비슷해졌다. 목적지보다 출발할 타이밍을 먼저 떠올리게 됐고, 하루를 채우기보다 흘려보내는 속도를 먼저 생각하게 됐다. 에든버러는 그렇게 남았다. 여행지라기보다는, 시간을 대하는 기준처럼.


작가의 이전글유학생의 옷장은 어떻게 완성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