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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장장 Feb 28. 2019

디지털 혁명과 디자인의 역할

혁명이 요구하는 것, 개념화 역량

[대홍 웹진] NO. 260 | 2019년 1+2월호

 https://www.daehong.com/index.php/webzine/webzine/webzine_popup 

집필 중인 '인문디자인 씽킹' 일부를 기고한 글입니다. 링크를 클릭하면 PDF 파일을 다운로드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혁명적 변화의 시작

필자는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에 근무하던 초기 시절인 1990년대 후반, 소니 워크맨과 삼성 마이마이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분해해서 비교하는 전시를 본 적이 있다. 워크맨은 나사 하나까지도 정밀하고 작고 가벼웠다.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소니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즈음, 반도체를 사용하는 디지털 기술이 급진적으로 발전했다. 몇 년 후 영상·사진·음악 등의 기록은 필름·CD 같은 저장장치에서 데이터 공유 개념으로 바뀌었고, TV의 덩치 큰 CRT 화면은 얇고 평평한 LCD 화면으로 대체됐다.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삼성은 어떻게 소니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 시기 소니·애플·삼성 3사의 디지털 기술 전략을 살펴보자.


소니는 자사 제품에만 사용 가능한 독특한 규격의 메모리스틱이라고 이름 붙인 저장장치와 TV·카메라 등의 성능을 고도화한 퀄리아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당시 아날로그 기술의 절대강자였던 소니는 기존의 아날로그 제품에 디지털 기술을 추가하는 점진적인 변화를 꾀했다. 이에 반해 후발주자였던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와 평면 디스플레이 기술 개발에 집중했고, 애플은 아이팟이라는 MP3 플레이어와 아이튠즈라는 MP3 음원 공유 플랫폼을 상품화하는 등 디지털 기업으로 변화하는 전략에 집중했다. 그 결과 아이팟은 소니의 아이콘과 같은 워크맨을 시장에서 사라지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삼성은 평면 TV 1위 기업이 됐다. 절대강자 소니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급진적인 변화에 대한 전략적 선택이 한순간에 기업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이 변화가 당신에게는 얼마 만큼의 크기로 보이는가?


혁신과 혁명의 차이

변화는 크게 점진적인 변화와 급진적인 변화로 구분된다. 점진적인 변화는 시나리오를 쓰는 것과 같이 예상 가능한 변화를 말하지만, 급진적인 변화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변화의 폭과 높이가 크다. 그래서 혁신의 시대와 혁명의 시대는 대처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혁신을 한자로는 革(가죽 혁) 新(새로울 신)이라고 쓴다. 짐승의 피부가 털이 빠지는 고통을 감내하면 가죽이 된다는 뜻이다. 혁신적 새로움은 어려움을 극복하거나 가진 것을 변화시켜서 만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상도 가능하고 변화도 점진적이다. 그러나 혁명은 다르다. 혁명은 한자로 革(가죽 혁) 命(목숨 명)이라고 쓴다. 새로움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걸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래서 ‘혁’에 담긴 의미는 오히려 작아진다. 디지털혁명은 기업의 모든 것을 걸고 변화해야 이룰 수 있기에 혁명적인 변화에 해당한다.

 

이상을 정리하면, 혁신은 새로움을 만드는 수단으로 고통을 사용하지만, 혁명은 그 수단으로 목숨을 걸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목숨을 걸고 만들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혁명이 요구하는 것, 개념화 역량

고속철도와 닌텐도 게임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때를 기억하는가? 고속철도는 편리함을 무기로 항공산업을 긴장시켰고, 닌텐도 게임기는 실내 놀이로 나이키와 같은 신발기업의 매출에 영향을 주었다. 고속철도와 닌텐도 게임기는 동종업계 상품 간의 경쟁에서 이동과 놀이라는 개념 간의 새 경쟁구도를 탄생시켰기에 위력적이었던 것이다. 21세기에는 이러한 경쟁구도가 일상화된다. 불과 20여 년 사이에 디지털 기술은 인공지능·블록체인·스마트와 같은 새 개념과 알파고·비트코인·우버와 같은 새 상품을 탄생시키며 세상을 급진적으로 재편시키고 있다. 알파고는 바둑 프로기사를 능가했고, 비트코인은 화폐 개념을 변화시켰으며, 우버는 사람의 이동 방식을 바꾸었다.


새 개념은 대체로 인문적 경험을 통해 얻은 영감(Inspiration)을 나만의 언어로 바꾸는 통찰(Insight)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무인양품(無印良品)은 장자의 무(無) 사상에 근거하여 비움과 포용의 미학을 생활용품에 담아냈고, 애플은 하이데거의 존재 철학에 근거한 유비쿼터스 컴퓨팅(UC) 개념을 재해석하여 터치 방식으로 작동하는 아이패드라는 상품을 탄생시켰다. 이렇듯 성공한 브랜드는 인문과학적 영감에 근거한 자신만의 개념을 상품화해서 새 경쟁구도를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간다. 그러나 한국기업은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인문은 사라지고 기술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결과 검증된 선진기업의 개념을 빌려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 익숙함이 디지털 혁명 시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되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분석’에 따르면, 500대 기업에 포함된 한국기업은 2015년 17개를 정점으로 하다가 2018 년에는 15개 기업으로 줄었다. 중국기업은 1997년 3개에서 2017년 109개 기업으로 급증했다. 경제규모·투자금액 우위·선진기술 도용 등에 따른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으나, 자기 합리화가 강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그보다는 개념화 역량의 차이에서 야기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 변화를 주도하는 새 개념을 만드는데 주저하는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디자이너는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을 상품화하는 사람

디자인을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하고자 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허버트 사이먼(1916~ 2001)은, 약을 처방하거나 정책을 궁리하거나 고속도로를 설계하는 것과 같은 지적 활동 전반을 디자인이라고 정의했다. 창조활동을 하는 사람은 모두가 디자이너라는 뜻이다. 이 정의는 지금도 널리 사용되고 있다. 애플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마크 카와노는 조직 전체에 배어 있는 디자인 문화가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다고 회고했다. “(애플에서는) 모두가 디자이너”로, 엔지니어를 비롯한 모든 직원이 디자인을 생각하고, 디자이너처럼 사고한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디(De=designare, 가리키다)’와 ‘사인(sign, 상징)’의 합성어다. 그래서 “가리키는 것을 상징화한다”는 뜻이 된다. 여기서 가리키는 주체가 나 자신이므로 디자이너는 자신이 가리키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개념화하는 디(de)의 작업과 그 개념을 상징화하는(상품화하는) 사인(sign)의 작업, 두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디자인이 발달한 지역에서는 초·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예술과 철학을 학습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쓰는 ‘디(de)’의 과정을 먼저 몸에 익히고, 대학에 들어가서 전공영역별로 개념을 상품화하는 전문적인 ‘사인(Sign)’ 교육을 받는다. 그런데 우리는 고등학교 때까지 인문과학 교육이 생략된 채로 곧장 건축디자인·엔지니어링 디자인·패션디자인과 같은 전문적인 디자인 관련 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디(de)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창의적인 디자인을 제출하고 발표하는 숙제를 하고 학점을 이수한다. 그 결과 생각을 개념화하고 그 개념을 상품화 하는 일에 익숙한 디자이너(designer)가 아닌, 예쁜 모양을 만드는 것에만 능숙한 사이너(signer)를 양산하고 있다.


무인양품과 애플은 “모두가 디자이너”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기업이다. 그래서 모든 구성원이 새 개념을 만들고 그 개념을 상품화하는 활동에 익숙하다. 그 결과로 해당 산업을 주도한다.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만 모인 조직을 디자인 조직이라고 부르는 기업은 21세기 디지털 기술 시대에 시장을 주도할 기회를 잡기 어렵다. 디자인(design)이라고 쓰고 사인(sign)이라고 읽는 문화를 가진 기업은, 개념은 선진기업의 것을 빌린 채로 예쁜 모양을 만드는 장식 활동에 디자인 역량을 소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극복해야 할 한국 디자인의 현주소, “문송합니다”

새 개념을 요구하는 디지털혁명 시대에 한국과 같이 생각을 개념화하는 디(de)의 훈련이 부족한 나라에서는 인문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표현방법을 전 공한 사람 간의 상호협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야만 생존에 필요한 상품을 디자인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에서는 ‘문송합니다’라는 새 말이 회자되고 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라는 뜻으로, 인문과학에 대한 지식과 언어적 표현 역량이 풍부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왜 죄송해야 하는가? 이미 풍부한 사인(sign) 역량이 충분한 한국 기업이 디(de)의 역량과 조화를 이룬 기업문화를 확보한다면, 경쟁기업과 차별화된 디자인 역량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의 현실 상황에서 진정한 디자인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인문과학 인재를 충원하거나, 기존 인력의 생각을 개념화하는 훈련에 집중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등학교에서는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에서는 전공을 공부하며 공부 그 자체에 몰입했다. 그 결과, 멈추어 보고, 거닐며 보고, 노닐며 보는 즐거움을 잊었다. 이를 회복하는 훈련을 함으로써 인문과학적 상상력을 충전하고 새 개념을 탄생시킬 수 있다.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서 일 한지 15년 여가 지난 후인 2012년이 돼서야 디자인의 진정한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대기업의 디자이너였던 나 조차도 디자인을 사인에 치우쳐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5년 여의 연구와 학습의 과정을 통해서 디자인의 디(de)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알기 시작했다.


한때 삼성전자는 인문과학을 전공한 사람을 선발해서 디지털 시대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S/W 디자이너로 성장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나,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내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문과학적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에게 단기 성과를 요구하는 효율 중심의 기업 문화가 발목을 잡은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선발된 사람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이 글을 마치는 지금 자못 궁금하다.



인문학공장 공장장 김경묵은 삼성전자에서 20여 년간 디자이너로 일했다. HBR(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논문을 게재(2015)한 유일한 한국 디자이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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