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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by 우승리

시골이라 하면 흔히 강원도 산골짜기나 전라도 어느 한적한 마을을 떠올리겠지만, 사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도 인프라의 부족함을 느끼기엔 충분하다. 내가 자란 곳도 서울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경기도의 한 마을이었는데,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너네 집 인터넷 되냐?”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종종 듣곤 했다.


그런 내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생전 처음 우리 동네를 벗어나 자취를 시작했다. 그때는 독립이란 단어의 무게를 전혀 몰랐다. 방 한 칸 얻고 살림살이를 몇 가지 들여놓으면 끝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혼자 산다는 건 냉장고의 남은 반찬부터 막힌 변기, 청소기의 먼지 필터까지,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다행히 학교 구내식당 덕에 끼니 걱정은 덜었지만, 독립이란 단어는 낭만보단 불편함에 가까웠다.


처음에는 그렇게 정신없이 바쁘게 살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슬슬 취미생활에 대한 욕구가 올라왔다. “뭔가 나만의 특별한 취미가 필요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성격상 운동처럼 격렬한 취미는 딱 질색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디지털카메라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당시엔 핸드폰 카메라 성능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고, DSLR의 묵직한 손맛과 선명한 화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문제는 돈이다.


용돈 받는 처지에서 비싼 DSLR을 새로 산다는 건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현실과 타협해 중고 시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카메라 커뮤니티에서 살다시피 하며 괜찮은 매물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시세보다 20만 원 정도 저렴한 카메라를 발견했다. 그 순간의 설렘이란! 혹시라도 매물을 놓칠세라 급하게 판매자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거래를 진행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카메라 판매 글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아, 네~ 사용한 지 얼마 안 됐고요, 급하게 팔아야 해서 싸게 올렸습니다.”


판매자의 말에 특이할만한 이야기는 없었다. 하지만 첫 중고거래, 게다가 택배 거래라는 사실에 걱정이 많이 됐다. 물건은 싸게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생면부지의 거래 상대에게 돈을 보내자니 걱정은 점점 커가고 있었다. 그때 듣게된 그의 이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정직한이요.”

“네? 정직…한요?”


순간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다녔다. 지금 나랑 장난치나? 그런데 신분증 확인을 위해 알려준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실명 인증 사이트에 입력해보니 진짜 실존하는 이름이었다. 실제 이름이라는 걸 알고 나니 거래 대상이 '정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긴장이 탁 풀려버렸다. ‘이름처럼 정직한 사람이겠지’라고 순진하게 믿고 계약금을 보냈다.


하지만 계약금을 보낸 뒤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물건을 발송했다는 증거도 없이 잔금을 요구하더니, 연락마저 뜸해졌다. ‘아, 이거 당했구나.’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몇 번의 설득과 언쟁 끝에 상대방의 입에서 나온 건 욕설이었다.


그 길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시큰둥했다. “소액 사기는 잡기도 어렵습니다.” 경찰은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금액이 크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나름 관할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해결해보려 했지만, 아버지께서 “고소하면 네 신원이 노출될 수도 있다”라며 걱정하셨고, 결국 나는 고소를 포기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택배 거래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정직한’이라는 이름 석 자가 선명히 남아 있다. 이름은 정직했으나, 그 이름에 걸맞지 않았던 그의 행적은 내게 어른이 되는 법을 아주 비싸게 가르쳐 주었다. 20만원짜리 인생 수업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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