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에 내게 종교는 삶의 방향과 가치관에 깊게 뿌리내린 나침반이었다. 내가 몸담았던 개신교 분위기는 유교적 엄격함과 토속 신앙의 잔재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래서인지 술, 담배, 그리고 성과 관련된 것들은 죄악의 범주로 분류되곤 했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술이나 담배를 하면 지옥에 간다고 여겼다. 물론, 그것이 문자 그대로의 형벌이라기보다는, 내 안의 금기로써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내 가치관에 균열을 가져다준 사람은 아이러니하게 고등학생 시절 나를 가르쳐 주신 교회 전도사님이었다. 성경 공부 중 그분의 대화는 때로는 도발적이었다. “동거는 죄일까?” “술은 왜 나쁠까?” 그는 늘 생각의 경계를 흔드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그 질문들은 단순한 도덕적 결론을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바라볼 창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열린 창문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동아리 모임에서 자연스레 따라갔던 치킨집에서였다. 주변 친구들이 시원한 맥주를 주문하며 즐겁게 떠드는 모습에 나도 용기를 내어 한 잔을 시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술에 강한 사람일 거라고 믿었다. 마시지 않은 경험 속에서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첫 모금에서 내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남들이 “캬!” 하고 시원하게 외칠 때, 나는 본능적으로 “우엑!“이라는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맥주의 맛은 예상 밖이었다. 마치 오줌을 맛본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씁쓸하고 이상했다. 그렇다고 내가 오줌을 마셔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첫 맥주는 내게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다음으로 마셔본 소주는 조금 달랐다. 쓰긴 했지만, 맥주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술을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종종 술자리에서 소주를 조금씩 홀짝이곤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내 입맛은 점점 달라졌다. 이제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반대로 소주는 독한 맛 때문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술과 그다지 잘 맞는 사람은 아니다. 술자리의 왁자지껄함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 약속이 파투난다면 집에돌아와 따뜻한 이불속에 눕는 순간이 더 행복하다.
술을 마시는 것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 꼭 어른이 되는 필수 조건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고수하던 가치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가치관을 넘어서 무언가를 경험해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분명 성숙한 과정이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나?“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음식이라도 실제로 맛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똥맛일 수 있다는 걸.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은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 실체를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술이 나쁜 것이라는 종교적 가치관은 누군가에겐 절대적인 진리일지 몰라도, 또 누군가에겐 그저 무의미한 말일뿐이다. 나에게 술은 더 이상 금기나 금욕의 상징이 아니다. 다만 기분 좋을 때 한 잔쯤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음료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술이 아니라, 집에 돌아와 따뜻한 이불속에서 나만의 평화를 찾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사소한 진실들을 하나씩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