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에는 외할머니, 조분례 할머니의 존재가 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밭에서, 들에서 하루 종일 일하셨고, 그 빈자리는 언제나 할머니가 채우셨다. 나와 동생의 어린 날은 할머니의 손길로 가득했다. 음식도, 보살핌도, 사랑도.
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단출한 메뉴는 언제나 맛있었다. 김 위에 밥을 얹고 단무지 하나를 올려 자르던 손길, 간장에 비빈 흰쌀밥 한 그릇, 그리고 일주일 내내 같은 참치김치찌개. 똑같은 음식이어도 매일 새롭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쉬지않고 무언가를 갈고 으깨어 내미시곤 했다. 참외며, 사과며, 감자며, 무엇이든 우리를 위해 부드럽고 먹기 좋게 만들어주셨다. 그 뼈마디까지 보이는 손이 어떻게 그리도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모른다. 그 작은 손에서 전해지던 사랑은 아이였던 내게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손주가 여덟이나 되었지만, 우리 둘은 막내딸의 아이들이라 더 어리게만 보셨던 것 같다. 70이 넘으신 나이에 버스를 타고 이 집, 저 집, 손주들을 챙기시던 할머니.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며 끝없는 사랑을 나누셨다. 그 무한한 사랑의 끝은 어디였을까. 나는 아직도 모른다.
밤이면 할머니는 우리를 옆에 눕히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옛날이야기를 만들어내듯 술술 풀어내던 이야기들.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단단했으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생생했다. 어린 마음에 생각했다. '할머니가 되면 누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잘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사춘기가 오며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특히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 할머니의 반응이 그랬다. 친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와 집에서 밥을 먹고 갈 때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마뜩잖아하셨다. “남의 집에서 밥 축내지 말고 집에서 먹어라”라는 핀잔 섞인 말도 종종 내뱉으셨다. 어릴 땐 그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인색하실까? 우리 집은 먹을 게 부족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친구들 앞에서 할머니의 한 마디가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 한편으로는 서운하기도 했다.
어른이 된 지금에야 깨닫는다. 6.25 전쟁으로 난리통에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 없는 살림에서 다섯 남매를 키우셨던 할머니. 그 세월이 만들어낸 억척스러움이었다는 것을.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 작은 것 하나도 아껴야 했던 기억들이 몸에 새겨졌다는 것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할머니에게 “다른 집 아이들까지 챙기는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늘 할머니가 온화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를 “똥강아지”라 부르며 늘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던 모습만을 기억했다. 그러나 이모와 삼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 시절의 할머니는 엄하고 강인한 분이었다고 했다. 그 낯선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할머니의 사랑은 흙냄새 같은 것이었다. 소박하고 따뜻했지만, 그 안에는 한평생의 고단함과 헌신이 배어 있었다. 어린 날의 나는 그저 하염없이 그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무게를 지녔는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야 말할 수 있다. 그 사랑은 나를 키운 뿌리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