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한강 작가는 어린 시절 지은 시를 언급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짧은 시 한 편이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을 노래한 곡만 해도 수천 개, 사랑을 정의한 문장도 수백 개가 넘지만, 여전히 사랑은 어렵고도 어려운 주제다.
나는 한때 사랑을 아주 좁은 방 안에 가두려 했다. 내 안에 가두면 사라지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문을 닫고 빗장을 걸수록 사랑은 더 쉽게 부서졌다.
첫 연애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그 시절, 다음(DAUM) 메일과 버디버디 쪽지가 우리의 카톡이었고, 싸이월드 다이어리가 우리의 인스타였다. 나는 교회에서 친해진 중학교 1학년 친구와 연애를 시작했다. 서툴고 어설펐지만, 좋아한다는 감정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문제는 연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 나는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상대와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었고, 더 확인받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가 이랬어.”
“○○가 그러던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조여왔다.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인데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상상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 둘이 자주 연락하는 걸까?’
‘혹시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처음엔 애써 태연한 척했다. 그런데 신경 쓰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결국, 어느 날 나는 터져버렸다.
“그 남자랑 연락 안 하면 안 돼?”
나는 그녀가 나만 바라봐 주길 바랐다. 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녀가 나를 선택했다는 걸 증명받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사랑이 오래갈 리 없었다. 나는 사랑을 한다고 믿었지만, 실은 내 불안과 열등감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었다. 관계를 움켜쥘수록 사랑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 연애는 짧게 끝났고, 나는 끝난 연애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그녀는 이미 나를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두 번째 연애를 했다. 같은 동아리에서 한 살 많은 친구를 만났다.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녀가 웃으면 주변까지 환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부터 ‘누나’라고 부르지 않고 반말을 했다. 거리를 좁히고 싶었고, 대등한 관계로 보이고 싶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몰랐고, 관계를 쌓아가는 법을 몰랐다. 그저 함께 있는 시간이 곧 사랑의 크기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를 바래다주겠다며 지하철을 두 시간씩 탔다. 늦은 밤, 나란히 앉아 흔들리는 전철에 몸을 맡기다 졸기도 했지만, 그녀가 내리기 직전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 가.”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그 순간이 싫었다. 나는 더 있고 싶었고, 더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정작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웃음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웃음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까 ○○가 웃겨서 한참 웃었어.”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점점 그녀의 웃음을 부담스러워했다. 아니, 사실은 부러워했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웃게 만든 사람이 ‘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 얘기, 꼭 나한테 해야 돼?”
나는 그녀의 웃음기를 하나씩 지워갔다. 처음에는 그 웃음이 좋아서 시작한 연애였는데, 결국 그녀가 나와 있을 때는 점점 덜 웃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연애는 끝이 났다.
나는 또다시 오래 미련을 두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장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매력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매력 앞에서 불안해했다. 그래서 더 꼭 붙잡으려 했고, 결국 스스로 관계를 무너뜨렸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연애와 사랑이 다르다는 걸 몰랐다. 나는 연애를 하면 당연히 결혼까지 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연애를 사랑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히 한 사람을 향한 감정이 아니라, 서로의 우주를 공유하는 과정이었다. 나는 그것을 몰랐다.
내 연애는 마치 나 혼자 꾸리는 작은 방 같았다. 상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꿈꾸던 연애의 틀에 그녀를 맞추려 했다. 그러니 그 방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연애가 끝난 뒤에도 미련이 남았지만, 나는 조금씩 시선을 돌려보기로 했다. 휴학을 하고 1년 동안 일을 하며 모아둔 돈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으로 연애가 아닌, ‘나’라는 세계를 중심에 둔 삶을 살아봤다.
그제야 깨달았다. 사랑은 가둬둘수록 사라지는 것이고, 스스로 온전한 우주가 될 때야 비로소 누군가와 진정한 우주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서툴지만 조금씩,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