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은 읽기 쉬우면서도 마치 주인공과 함께 여행을 떠난 듯한 착각을 주는 책이다. 이야기 속의 여러 여행길을 따라다니며 나도 언젠가는 이런 자유로운 여정을 떠나보리라 생각했다.
직장에 취직한 뒤로 장기 여행은 꿈도 못 꿀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조금은 긴 시간 쉴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한달이 조금 모자라는 시간인데 무얼할까 고민했다. 가까운 동남아로 여행을 가기에는 모처럼만의 긴 휴가가 아쉬웠고 그렇다고 먼 곳을 가자니 어디로 가야 좋을까 고민이 됐다.
고민하던 중 문득 지인이 최근 스페인에 갔다는 게 생각났다. 대학생 때 유럽여행을 했지만 스페인은 루트가 안 나와서 갈 수가 없었다. 이참에 못 갔던 스페인을 가보자는 생각으로 스페인 여행을 준비했다.
여행지를 결정 했으면서도 한동안 망설이다가 급 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버렸다. 나름 저렴한 가격이라 생각되어 나도 모르게 결제 버튼에 손이 간 것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막상 스페인 여행을 가려니 뭔가 아쉬웠다. 기간이 꽤 긴데 "여행만 둘러둘러 갔다 오면 남는 것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났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 덕분이다. 연금술사에서의 여정이 꽤나 인상 깊게 남아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떤 로망으로 자리잡았다.
내 생에 이렇게 길게 쉴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일반적인 스페인 여행을 하려던 일정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수 있는 여정으로 급하게 변경했다.
일반적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배낭을 메고 여행한다. 그리고 걷는 여행이기 때문에 등산화가 필요하다. 대강 정리해보면 굵직한 건 다음과 같다.
배낭, 침낭, 등산화, 판초우의
여행을 다녀온 후 준비물을 돌이켜보며 몇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음과 같다.
배낭은 꼭 가볍게 준비하자
배낭, 침낭, 등산화, 판초 외에는 사실 별 필요 없을 것이다.
우선 첫번째 문제는 배낭 크기에 있었다. 내가 백패킹용으로 가지고 있던 배낭은 카즈카의 75리터 짜리 배낭이다. 배낭 자체가 이미 3.5Kg을 넘어가기 때문에 빈 가방조차 꽤 무거웠는데 배낭 크기가 크다 보니 생각없이 이것 저것 막 때려넣은 결과 전체 무게가 15Kg은 훌쩍 넘어버렸다. 그렇게 무거운 배낭을 지고 400Km 가까운 길을 걸었는데 순례길의 가르침 보다는 힘들다는 생각이 더 크게 들었다.
두번째로 안 그래도 무거운 가방이 가서 보니 쓸데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정말 버리고 싶은 몇가지가 있었는데 블루투스 스피커와 외장하드다. 무게로 보면 무거운 무게들은 아니었는데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모여 결국엔 배낭을 무겁게 만들었다. 전자제품이라 아까워서 버리지도 못하고 특히 외장하드에는 데이터도 있으니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준비물을 준비할 땐 반드시 배낭 무게를 측정해보고 순례길 외에 나머지 여행에 필요한 짐들은 미리 산티아고에 우편으로 붙이는 걸 추천한다.
유용했던 물품은 침낭, 판초, 스틱, 슬리퍼 등이다. 11월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한 낮에는 여러겹 입은 옷들로 꽤 덥고 밤에는 숙소에서 라디에이터를 틀어놔서 춥진 않다. 문제는 새벽만 되면 숙소에서 라디에이터를 꺼서 찬바람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듣기로는 화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라디에이터를 새벽에 끈다는데 정작 정말 추울 때 라디에이터를 꺼버리니 침낭은 필수 챙겨야 한다.
참고로 나는 너무 무거운 배낭 탓에 침낭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며칠 동안 무거운 배낭을 지고 종일 걸었더니 무릎이 나가버렸다. 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배낭 무게를 줄이고 싶었는데 가지고 있던 침낭이 저렴한 걸로 샀더니 침낭 무게만 3Kg이 넘어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다음으로 유용했던 건 판초다. 내가 걸었던 2주라는 시간동안 다행히 항상 비가 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비가 중간중간 내렸다. 판초를 챙겨갈 때 유의할 건 입고 벗는 것이 편한 판초가 좋다. 날씨가 자주 바뀌다 보니 입고 있으면 덥고 벗어두면 갑자기 내리는 비에 젖는 일이 있어서 벗고 입는 것이 간편한 우의를 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판초 입겠다고 비오는 와중에 그 무거운 배낭 내려놓고 다시 메는 과정에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다.
스틱은 무릎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 오르막 길은 대체로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녀도 무릎에 문제가 생기진 않는데 내리막 길은 정말 위험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에도(1개월 정도 지남) 무릎이 여전히 좋지 않다. 데카트론에서 저렴한 스틱을 구매할 수 있으니 귀찮아도 산 길을 오르내릴 땐 구비하면 좋다.
마지막으로 슬리퍼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나면 등산화를 벗는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전혀 귀찮은 물품이 아니니 꼭 챙기면 좋을 것 같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여러 루트가 있다. 대표적인 루트가 몇가지 있는데 나는 그 중 사람들이 많이 간다는 프랑스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 프랑스길은 800Km 정도의 긴 길로 한 달 이상이 소요되는 길이다. 아무리 휴가가 길게 있다곤 해도 한달이라는 시간을 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코스를 단축시킬 필요가 있었다. 앞 쪽을 걸을까 뒤 쪽을 걸어 산티아고 성당을 볼까 고민하다가 끝을 맺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약 2주 정도의 시간에 산티아고 성당까지 갈 수 있는 ‘레온’이라는 도시 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항공권이 마드리드 IN, OUT 이었기 때문에 마드리드에서 레온으로 이동해야 했다. 다행히 나보다 먼저 같은 루트를 갔던 분이 있어서 그 글을 참고했다.
마드리드에서 레온으로 이동하는 방법 중 하나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약 4시간 정도가 걸리는데 ALSA 버스를 이용했다. 마드리드에서 레온으로 가는 ALSA버스는 정류장이 몇 군데 있는데 나는 Moncloa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했다. Sol 광장에 숙소가 있어서 Sol에서 지하철을 타고 Moncloa로 이동해서 Moncloa 지하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Moncloa역에서 당황스러웠던 건 당연히 터미널에 가면 인포메이션이 떡하니 보일 줄 알았는데 내가 제대로 찾지 못 했던 것인지 인포메이션을 못 봤다. 덕분에 레온으로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야하는지 조금 헤매였다. 다행히 친절한 할머니의 도움으로 레온으로 가는 정거장을 쉽게 찾았다.
지하 터미널에서 기둥을 보면 위 사진과 같이 목적지가 표시되어 있다. 레온에서는 알베르게에서 바로 짐을 풀고 크레덴셜을 알베르게에서 구입했다. 하루 레온에서 머물고 다음날 일정으로 순례길에 오를 수 있었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는 있지만 대체로 나쁜 의도를 갖고 여행중인 사람은 없는 걸로 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 물품들을 태평하게 관리할 정도로 안전하진 않다. 일례로 나는 마드리드 숙소 캐비넷에 배낭을 두고 작은 자물쇠로 잠궈놨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누군가 자물쇠 걸이를 부순 걸 확인했다. 다행히 분실한 물품은 없었는데 누가 단순히 술취해서 그런건지는 확인하지 못 했다.
그리고 레온에서 머문 알베르게에서는 동양인들 중심으로 현금이 털렸다는 사실을 다음날에야 알게 됐다. 해당 알베르게에서는 오후 7시 쯤 순례자들을 데리고 미사를 드리는데 그때 모두 자리를 비운 시간에 범행을 저지른 것 같다. 그리고 약싹 빠른 것이 동양인들이 대체로 현금이 많은데다가 범행신고에 적극적이지 않다보니 동양인들 위주로 노린 것 같다. 도둑질 한 놈이 문제이지만 개인적으로 항상 조심하길 바란다.
현금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으로 추천하는 방법은 현금을 여러 곳에 분산 시키는 것이다. 배낭에 일부 분산, 항상 메고 다니는 휴대용 배낭에 일부 그리고 현금출금이 가능한 카드를 구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권장한다.
레온에서 산티아고 까지는 대략 300키로 정도의 길이다. 중간에 큰 산을 한번 넘고 그 뒤로 몇 번 오르락 내리락 반복하다가 슬슬 고도가 낮아지며 산티아고를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미 여러 순례자들의 글을 통해 알게 되겠지만 순례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 않고 정해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중간에 자주 보던 얼굴과 계속 마주하게 된다. 주의할 것은 레온에서 출발한 사람과 프랑스에서 부터 출발한 사람들은 체력이나 경험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체력을 갖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쉽게 따라잡으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 이건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다. 다른 사람 페이스에 맞춰 여행을하게 되면 본인 여행을 망치는 것은 물론 순례길에 오른 이유가 퇴색될 수도 있다.
한가지 고마운 사실은 순례길에서 서로 마주함과 헤어짐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서로에 대한 존중으로 먼저가거나 늦춰 가는 것에 구애받지 않고 배려하는 것이 기본 마인드다. 다만 여기서 조금 자유롭지 않은 것이 일반화하는 것은 논란이 있겠지만 한국인들의 경우 이런 사람을 보내고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한쪽은 꾹꾹 참으며 여행을 하고 다른 한 쪽은 따라간다고 힘겨워 하는 현상들이 종종 보인다. 모처럼 순례길에 올랐으니 만남과 헤어짐을 자연스럽게 존중하는 문화가 형성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같이 여행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전우애’ 같은 감정도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같을 수 없으니 기본 원칙은 상대 페이스에 대한 존중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행길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은 ‘배신’이 아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것이 늘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순례자들 끼리 서로 ‘무슨 이유로 걷고 있니?’ 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순례길 끝에 다다르면 무언가 대단한 것을 얻을 것처럼 걷기도 한다. 다만, 모든 결과가 나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오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순례길 끝에 이르렀다고 해도 아무 느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니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접근하는 것은 지양하길 바란다.
그럼에도 순례길을 걷다 보면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친구들과 잠시 헤어지며 느꼈던 생각들. 그리고 순간 순간 마주하게 되는 문제들. 그런 과정들을 체득하며 배우는 것들이 있다.
여러 경험자들은 조언한다. 너무 결과와 목표에 국한 된 생각들로 인생을 달려가지 말라고 말이다. 순례길은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의 축소판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길을 떠나며 여러 마을을 지나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그들과 반목하기도 하며 다시 또 길에 오른다. 걸으며 무얼 버려야 할지 선택하기도 하고 무얼 담아야 할지 배우기도 한다. 그런 과정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산티아고 성당이 큰 의미로 항상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니 어떤 큰 의미를 두고 여행을 떠나는 것 보다는 작은 소소함을 즐길 준비로 가볍게 떠날 것을 권한다.
참고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적지 않은 시간을 요구한다. 인생에서 그런 휴식기를 가질만한 순간이 많지 않다. 내가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도 대체로 군대를 전역하거나 대학생들은 휴학을 했거나 휴강 기간에 그리고 직장인들은 이직을 하거나 아니면 직업 자체가 길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 그리고 은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다른 많은 여행지를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을 트레이드 오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때문에 너무 큰 로망에 휩싸여 여행하는 것을 피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이런 트래킹 여행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면 느리게 이동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다. 자동차나 비행기로 이동했을 때 얻을 수 없는 매력은 찰나에 지나가는 멋진 장면들을 오랜 시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보여지는 풍경들 속에서 빠르게 지나치면 보지 못했을 깊은 감상적인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내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고 무엇이나 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이다. 다만, 나에게 이런 시간이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함. 나와 함께 걸었던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느꼈던 생각들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