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애타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던 때가 있었다. 당시는 국가 부도의 위기였던 IMF 사태가 터진 직후라 평범한 대학생이 편한 과외 자리를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던 때였다. 거리를 지나다 창문에 서빙을 구한다는 공고가 붙어있는 식당이나 카페를 발견하면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문의했는데, 희한하게도 모든 사장님들의 대답이 똑같았다.
“아르바이트생 구했어요.”
버젓이 창문에 아르바이트생을 새로 구한다는 공고문이 붙어있는데도 가서 물어보기만 하면 다 이렇게 말했다. 그럼 공고문은 왜 붙여놓은 거냐고 물으면 역시 대답은 다 똑같았다.
“아, 그거 뗀다는 걸 깜빡했네.”
처음에는 정말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는데도 깜빡 잊어먹고 공고문을 떼지 않은 건 줄 알았다. 순진하긴....... 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같은 자리에 굳건히 붙어있는 공고문들을 본 뒤에야 난 사장님들이 내게 했던 그 말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얼굴로? 됐거든!”
그러다 나에게 딱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노량진의 대형 입시학원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논술 첨삭 아르바이트였다. 전공이 국어국문학인 데다, 논술 써본 경험이 많은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 첫날, 열심히 첨삭을 해놓았더니 내 꺼를 본 아르바이트생들이 배를 잡고 웃느라 자지러졌다
“초등학생이야?”
초등학생처럼 삐뚤빼뚤한 내 글씨가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써도 글씨가 초등학생이니 전혀 신뢰가 가지를 않았다. 좀 어른 글씨 같이 보이려고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써보았더니 더 이상해져서 봐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악필 교정이 하루 이틀에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용으로 승부를 보기 위해 남들보다 더 정성을 들여 열심히 첨삭을 해보았지만 그날 이후 학원에서 다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때 교정 못한 초딩글씨는 지금까지도 동료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 이 글씨로는 도저히 친필 사과문도 쓸 수가 없으니, 사과문 쓸 일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냉혹한 현실을 깨달은 나는 당시 골목 어귀마다 놓여있던 지역 정보지를 한 아름 안고 집에 가 구인란을 열심히 뒤졌다. 그러다 눈에 띄는 아르바이트 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나이트클럽 웨이터였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남의 한 나이트클럽에 웨이터로 들어갔다가 큰돈을 벌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들은 터였다.
먼저 전화로 면접 약속을 잡고 서울 홍대 앞의 한 유명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나이트클럽 앞에 도착하자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양복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면접을 보러 왔다고 말하자 마치 형이 동생을 대하듯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왜 돈을 벌려고 하냐, 집안 사정은 어떻냐, 학교는 어떻게 다니는 거냐, 다정하게 물어보며 위로해주는데, 매번 얼굴을 보자마자 딱지부터 놓는 사장님들만 보다가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니 울컥하는 마음까지 들었다. 그런데 월급을 묻자 그때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젊은 사람이 처음부터 돈 생각만 하면 안 돼. 처음에는 열심히 형들 명함 돌려주고, 술 마시고, 손님들 모시고 그러면서 배우는 거야, 그러다가 경험 쌓이면 독립해서 이름 알리고, 그런 뒤에 돈도 벌고 그러는 거지.”
“그럼 언제부터 돈을 벌 수 있는 거죠?”
“글쎄, 그거야 너 하기 나름이지.”
잠시 고민하다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고 얘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모든 걸 걸고 그 일에 뛰어들면 정말 큰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당장 돈을 벌자고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을 하더라도 학교는 다녀야 했고, 공부도 해야 했다.
문제는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찾은 건 학교 안에서 할 수 있는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처음에는 학교 교우회에서 회보를 봉투에 넣어 교우들에게 발송하는 일을 했는데, 비교적 간단한 일이었지만 똑같은 동작을 수천 번씩 반복했더니 나중에는 멀미가 나는 것 같았다.
가장 힘든 건 졸업식에서 졸업앨범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는 큰 비닐봉지에 앨범을 하나씩 넣어서 졸업생들에게 나눠주는 거였는데, 대학 졸업앨범이 상당히 무거웠다. 그 무거운 앨범을 집어 드느라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굳이 봉지에 앨범을 넣어 나눠주지 말고, 그냥 앨범과 비닐봉지를 함께 나눠주면 될 것 같았지만, 그걸 얘기했다가는 내 일자리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불필요해 보이는 일을 끝까지 다 마쳤다.
시간이 갈수록 내 경제사정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식사는 학교 구내식당 중 반찬 별로 따로 가격을 계산하는 곳에 가서 제일 싼 밑반찬들을 골라 해결했는데, 처음에는 서너 개였던 반찬이 나중에는 두세 개, 이후에는 한두 개로 줄어들었다. 학과 과방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가서 후배들을 만나면 밥을 사줘야 하는데, 내 밥값도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배 밥 사줄 여유는 없었다.
그렇게 다음 학기 등록금도 벌지 못하고, 밥값도 떨어져 가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군대였다. 주변의 친한 친구들은 카투사를 준비하거나, 위생병이 되기 위해 학원에 가기도 했지만, 난 가장 빨리 갈 수 있었던 육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힘겨웠던 알바 구직 고난기를 마무리했다.
요즘 뉴스에서 알바 하면서 학교 공부도 하고, 힘겹게 취업준비까지 해야 하는 대학생들의 소식을 들으면 그 시절 내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짠하다. 그때 그 시간들이 나를 성장시켜주었고, 내 인생의 디딤돌이 되어준 건 사실이지만 그걸 다시 하라면 두 번은 못할 것 같다. 장학금 제도가 전보다는 좋아졌다고 해도 여전히 졸업 후에 학자금 대출 갚느라 고생하고 있는 청년들이 많은 걸 보면 아직도 적지 않은 대학생들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것 같다. 젊은 시절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사는 건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젊음을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으로 다 써버린다는 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다양한 삶의 무게를 짊어진 청년들이 그 짐을 내려놓고 좀 더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와 더 나누고 싶은 이야기, ‘kkh_mbc@인스타그램’에서 편하게 소통하실 수 있습니다.]
www.instagram.com/kkh_m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