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의 산타, 택배가 도착했다. 세상에 반갑지 않은 택배가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 택배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반갑고, 설레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특별한 택배다. 묵직한 상자를 열어본다. 향긋한 새 책 냄새가 콧속으로 ‘쑥’하고 밀려들어온다. 상자 속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책들 속에서 조심스레 한 권을 꺼내본다. 옅은 민트색 표지 한쪽에 세로로 작게 써진 내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첫 출간이다.
시작은 1년 전 브런치였다. 정확히는 13개월 전이다. 2020년 3월 10일 ‘40대에 싱글 남자로 살기’라는 제목으로 첫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리기까지 몇 번을 망설이고 망설였는지 모른다.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글 잘 쓰는 사람은 너무 많고 각자의 콘셉트도 너무나 뚜렷했다.
‘내 글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뭘 쓸지’만 6개월을 고민했다. 모든 글을 관통하는 큰 주제를 잡아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어떤 주제는 이미 누군가 다 써버린 것 같고, 어떤 주제는 몇 편 쓰다 보면 소재가 다 떨어져 버릴 것 같고, 또 어떤 주제는 사람들이 관심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계속 시간만 흘러갔다. 이러다가는 영영 시작도 못해볼 것 같았다.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냥 쓰자.’
주제를 상관 말고 그냥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기로 했다. 내가 살면서 가장 감동받았던 이야기, 가장 마음 아팠던 이야기, 가장 깨달음이 밀려왔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써 내려갔다. 그렇게 글이 모이자 방향은 저절로 잡혔다. 실패를 거듭했던 내 지난날의 이야기, 지긋지긋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 이야기, 매일 같이 사표를 만지작거렸던 힘겨운 직장생활 이야기들이 글이 되고 매거진이 되어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다행히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갔고, 구독자 숫자도 올라갔다.
글을 쓰기 시작한 당시는 아버지가 지독한 당뇨 합병증으로 힘겨운 투병생활을 이어가고 있던 때였다. 집에서 쉬고 있다가 119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가기를 수차례, 장기간의 입원 뒤 가까스로 퇴원을 해도 하루 만에, 혹은 이틀 만에 다시 입원하기를 반복했다. 응급실 밖 대기실에 앉아 불안한 마음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때 손에 쥐고 있던 건 스마트폰 하나뿐이었다. 그때마다 브런치에 접속해 글을 쓰고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아버지와 병원을 오가며 느낀 것들은 그대로 글감이 되었다.
어떤 날은 응급실 앞에 앉아 브런치에 접속했는데, 내가 애독하는 한 작가님의 글이 올라왔다. 읽어보니 나처럼 응급실에 들어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쓴 글이었다.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동네에 살면서 나이까지 같은 분이었다. 투병 중인 어머니를 걱정하는 그분의 글에 너무나 공감이 됐고, 서로 댓글을 남기며 위로를 해줬다.
하지만 나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얼마 못가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가족의 슬픔을 추스르느라 글을 쓸 여력이 없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고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하게 되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나는 글 쓰는 사람이잖아. 아버지를 추모하는 글을 쓰자.’
글에 담기 위해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았다. 그러자 아버지의 80여 년 삶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버지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사셨는지, 아버지를 생각하며 앞으로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보였다. 내가 브런치를 시작하기 가장 잘했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추모글을 써서 올릴 곳이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아버지는 가셨지만 글은 남기에 아버지의 삶이 그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글을 본 독자들이 많은 위로의 말을 남겨주었다. 나보다 먼저 아버지를 떠나보낸 한 구독자는 일부러 메일을 써서 자신이 먼저 겪었던 큰 슬픔과 그것을 이겨냈던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한 경찰관 독자는 아버지를 추모하는 메일로 큰 감동을 주었다.
“아버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사진을 뵙고 나도 모르게 거수경례를 하였습니다. 저와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비슷한 듯합니다. 인천에서 경찰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49재날. 49재 의식을 모두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브런치에서 제안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와있었다. 한 출판사의 출간 제안이었다. 내 생애 첫 출간 제안이 아버지 49재날, 그것도 49재를 하고 있던 시간에 온 거였다. 이건 언젠가 책을 낼 날을 꿈꿔왔던 나에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주고 가신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 몇 곳의 출판사에서 출간 제안이 더 들어왔지만 난 아버지의 선물 같은 그 첫 번째 출판사와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시 여덟 달이 지난 오늘. 드디어 내 책이 세상에 나왔다.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 브런치에 썼던 한 글의 제목이 그대로 책의 제목이 되었다. 출판사에서는 이 제목만큼 나를 더 잘 보여주는, 내가 쓴 글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더 잘 말해주는 제목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나처럼 뭘 해도 한 번에 되지 않아 힘든 이들에게,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지친 이들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가치 있는 것들을 배우며 성장해가고 있는지를 얘기해주고 싶다. 내가 글을 쓰는 동안 함께 호흡해주고 공감해준 독자들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은 것처럼, 이 책이 지금 이 순간 주저앉고 싶은 이들에게 다시 일어나서 달려갈 힘과 용기를 주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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