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배우고 싶은 게 많은 편이다. 남들이 뭔가 잘하는 모습을 보면 ‘와... 잘한다’하며 감탄하고 손뼉 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습관적으로 ‘나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곧 자연스럽게 ‘나도 한 번 배워봐야겠다’는 말로 바뀌면서 이것저것 시도하게 된다. 물론 그중 상당수는, 아니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은 끝내 도전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영어회화다. 부끄럽게도 난 영어를 잘 못한다. 내 평생 수십 년째 못 넘고 있는 가장 높은 벽이다. 치열한 대학입시를 거치고, 취업시장에서 토익 전쟁까지 치르며 영어 공부에 엄청난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어쩌다 원어민을 만나기라도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뇌 속 깊이 수십 년 동안 쌓아놓은 문법책들 속에서 흐릿한 문장들을 끄집어내 떠듬떠듬 입 밖으로 내뱉어 보지만 상대가 “What?”하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다.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산물이라고 자조해보지만 그래 봤자 핑계 아니겠나.
영어치에서 탈피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시도도 여러 번 해봤다. 한동안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 전에 영어회화 학원을 다녀보기도 했고, 미국 드라마를 반복해서 들으며 받아 적어 보기도 했으며, 어디를 가든 꼭 귀에 이어폰을 꽂고 영어 라디오를 들으면서 다니기도 했다. 한때 친구를 통해 소개받은 원어민을 정기적으로 만나 대화도 해보았지만 내 영어회화 실력은 언제나 제 자리, 눈에 띄는 발전이 없었다. 그렇게 별 성과가 나오지 않는 도전은 매번 일에 치이고 일상의 피로에 젖으면서 점점 멀어지고, 끝내는 손을 놓는 결말로 이어지고 만다. 그럴 때마다 내가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 있다.
“이건 포기하는 게 아니야. 잠시 보류하는 거야.”
몇 년 전부터 영어의 자리는 일본어로 대체되었다. 요즘 자기 전에 30분이나 한 시간씩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기초부터 시작한 것만 벌써 네 번째이다. 책장에는 서로 다른 기초 일본어 책이 네 권이나 꽂혀있다. 그걸 본 한 친구는 내 취미가 ‘일본어 회화’가 아니라, ‘일본어 회화 책 모으기’가 아니냐는 의혹을 강력하게 제기하기도 했다. 변명을 하자면 그 책들이 손도 대지 않은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 끝까지 공부를 마쳤다. 하지만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한 번 손을 놓기 시작하면 그대로 몇 달이 지나가고, 그런 뒤에 다시 책을 펴면 전에 공부했던 것들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걸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매번 손을 놓을 때마다 나는 나만의 주문을 외운다.
“이건 잠시 보류하는 것일 뿐이야.”
몇 달 전부터는 전혀 새로운 장르에 도전을 했다. ‘글씨 쓰기’이다. 이것 역시 내가 수십 년째 넘지 못하고 있는 벽인데, 주변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초딩 글씨’라는 놀림을 받고 있는 나는 첫 책인 ‘한 번에 되지 않는 사람’의 출간 날짜가 다가오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책이 나오면 분명 책에 저자 사인을 해야 할 텐데, 에세이집에 초딩글씨라니 너무 안 어울리지 않은가. 고민 끝에 서점에서 글씨 연습 책을 사 와 매일 자기 전에 한두 시간씩 글씨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두세 달을 해봤더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직장을 다니는 나로서는 자기 전의 그 한두 시간이 책도 읽고 글도 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데, 매일 글씨 연습만 하고 있으니 책도 전혀 못 읽고 글도 전혀 못 쓰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에게 우선순위는 ‘독서’와 ‘글쓰기’인데, 이게 뒷전으로 밀리니 또 다른 불안감이 밀려왔다. 글씨가 바뀌려면 최소 6개월은 그렇게 매일 연습을 해야 한다는데 그 시간 동안 계속 독서와 글쓰기를 미뤄둘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난 이것도 ‘보류’했다.
이렇게 보류하는 것들이 늘어나다 보니 책장에는 갖가지 종류의 학습 서적들이 쌓여가고 있다. ‘나도 웹툰을 그리고 싶다’며 샀다가 1년째 대기 중인 ‘일러스트’ 책,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며 몇 년 전에 샀다가 그대로 색이 바래버린 ‘피아노 교본’, 건강에 좋다는 얘기에 매일 해보겠다며 산 ‘뜸뜨기’ 책 등 장르를 넘나드는 각종 학습 책들이 ‘대체 이놈의 보류는 언제 끝나는 거냐’며 원망하듯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끝을 보지 못한 채 이것저것 찔러만 보는 나를 보면 누군가는 “끈기가 없다”, “시간 낭비만 하고 있다”라고 지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책장에 쌓여가는 보류의 흔적들을 보는 것이 괴롭지 않다. 여전히 진심으로 그것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하지 못하는 것일 뿐, 분명 언젠가 기회가 왔을 때 다시 도전에 나설 것이라고 믿는다. 그 책들이 나에게는 일종의 ‘버킷리스트’인 셈이다. 그리고 언젠가 때가 되어 책장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무한한 즐거움을 느낄 것이다. 꼭 끝을 봐야만 맛이 아니다. 오히려 첫맛이 주는 즐거움이 더 클 때도 있다. 결과를 이루지 못했다 하여 얻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를 이룬 순간 느끼는 큰 기쁨 못지않게, 도전하는 긴 시간 동안 누리는 잔잔한 즐거움도 크다. 설사 지금 당장 도전에 나서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소망이 있는 한 포기라는 건 없다. 그렇기에 난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보류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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