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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피형아 Jul 25. 2023

#1. 불 꺼진 서른 중반에 빛이 되어준 구창모


첫 번째 이야기.







뜨거우면서도 찬란했고 시원하면서도 열정적이었던 내 나이 열여덟은 눈 깜빡할 사이에 훅하고 지나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만화영화 보다는 가요톱텐과 드라마를 훨씬 더 좋아했던 나는 내 나이 열 세살, 그때 S.E.S.의 데뷔 무대를 TV에서 처음 봤었고 그 어린 나이에 말 그대로 벙찔 수 밖에없었다. 여자친구들 앞에서는 말 한 마디도 못할 정도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엄청나게 내성적이었던 나.







누나들에게 미쳐서 코묻은 돈을 모아 매달 나오는 연예잡지를 사모았고 거기에 딸려오는 여러 가수들의 브로마이드를 받는 재미도 참 쏠쏠했다. 한번은 학교에 틴스타나 토마토, 포토뮤직 같은 잡지를 가져갔었는데 같은 반 여자 아이들에게 순식간에 둘러싸여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쾌거라고 할까? 그냥 기분이라는 단어로 정정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누나들을 제외하고 H.O.T.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에게 한 장씩, 한 장씩 커터칼로 예쁘게 잘라 나눠주기 시작했고 신화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 젝키를 좋아하는 여자 아이들에겐 그 사람들의 잡지를 잘라 나눠주니 이상한 쾌감 같은 걸 느끼게 됐다. 친구들은 내가 S.E.S.의 찐팬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날 이후로 여자 아이들은 나에게 누나들의 정보나 본인들이 산 잡지에서 누나들을 잘라 나에게 선물로 주기 시작했다.







내성적이었던 내 성격은 점점 바뀌게 되었고 웬만한 동성 친구들 보다 여자 친구들과 더 친해지기도 했었다. 그때는 팬클럽이라는 문화에 대한 개념이 없을 때라, 공식 팬클럽 가입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게 사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때 쯤? 공식 팬클럽 2기 모집을 한다는 소식을 내가 자주 보던 잡지를 통해 접했었고 그렇게 그때부터 나는 S.E.S. 공식 팬클럽 2기부터 마지막 6기, 그리고 유진 누나 솔로 팬클럽 파이시즈의 1기, 2기까지 가입하며 이 세상 모든 S.E.S. 팬들 중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발 빠르게, 모든 스케줄을 다니며 그야말로 정신 나간 골수팬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군대를 다녀오고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잠깐 직장도 다녀보니, 내 직업은 자유로운 게 가능한 업무 환경에서 해야겠다는 걸 알게 됐다. 그게 바로 프리랜서였고 나는 10년이라는 시간 넘게 영화에 대한 글, 리뷰 등을 쓰며 밥을 먹고 사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영화 행사가 많을 때엔 직장인들 야근과 맞먹을 정도로 숨 쉴 틈 없이, 거짓말 같겠지만 밥 한끼 못 먹을 정도로 바쁠 때가 있다. 반면 비수기 때엔 없어도 너무 없을 때도 있고. 때문에 어떨 때에는 친구들보다 많이 벌 때가 있고 어떨 때엔 친구들 정도, 어떨 때엔 확 못 벌 때도 있는 게 사실.







확실히 프리의 삶은 매력적이다. 지금도 프리의 삶을 접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너무 만족한다. 돈은 있다가도 없는 거니까. 어느 덧 서른 하고도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말도 안돼) 20대 후반 부터는 유진 누나의 스케줄을 어릴 때 만큼 따라다니지 않았다. 현생도 있었고 지금도 스스로 자신하는데 나만큼 누나들을 열정적으로, 미치게 쫓아다닌 팬이 없었으니까. 큰 행사만 종종 다니는 걸로 만족.


서른 중반이 되면서 나도 모르게 삶의 의욕이 좀 떨어지고 있었다. 프리의 삶에 만족을 하긴 했지만 가끔은 동종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도 있었고 뭔가 더 이상 앞으로 전진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취미라고 해봤자 영화를 감상하는 정도인데 거의 하는 일이 영화를 보는 거니 그마저도 떨어진 의욕을 끌어 올리기엔 많이 역부족했다.







그렇다고 등산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술을 크게 좋아하지도 않고 노래방 가는 것도 안 좋아하는 나. 여행하는 건 그나마 좋아하긴 하는데 그것도 시간이 맞아야 하고 무엇보다 여유 자금이 있을 때 가야 하니까 패스. 다행히 노래 듣는 건 참 좋아했다. 서른 중반 되기 직전이었나? 그쯤? 어쩌다가 엑스재팬의 예전 영상들을 보게 되었는데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뭔가 찌릿하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노래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해서 그런지 엑스재팬의 보컬인 토시의 음색에 매료됐고 속으로 "노래 참 잘 한다" 라고 생각했다.


블로그는 계속 하고 있으니까 언젠가 한번 엑스재팬 얘기를 끄적인 적이 있는데 댓글로 나와 같은 한국 팬 몇분이 발자국을 남겨주셨다. 그해 여름에 오사카를 시작으로 월드투어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도 함께 들었다.

원정을 뛰어 볼까? 그때는 노노재팬이 없을 때라,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2017년이었나? 그렇게 나는 엑스재팬 오사카 콘서트 원정을 가게 되었고 많이 떨어져 있던 삶의 의욕에 빛줄기가 되는 계기로 발돋움 했다.







너무 신나서 블로그에 엑스재팬 월드투어 라이브 인 오사카라는 포스팅을 얼마나 혼을 담아 썼었는지.

그리고 바로 한달 뒤, 엑스재팬의 보컬인 토시가 도쿄에서 디너쇼를 한다는 소식을 한국팬을 통해 알게 되었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어가 능숙한 한국팬과 친구의 도움을 받아 토시의 디너쇼까지 결제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86만 4천원. 그렇다. 나는 국내의 엑스재팬 팬들 중에서 최초로 토시의 디너쇼를 다녀온 한국팬이 된 것이다.







1년 뒤인 2018년 가을? 이번에도 엑스재팬이 대규모 콘서트를 한다는 소식을 알렸고 오사카 콘서트를 함께 다녀온 한국팬들과 인연이 되어 3일 공연 중 가장 마지막 날짜의 콘서트를 결제해 다녀왔다. 그 뒤로 토시와 요시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엑스재팬 콘서트는 지금 이 시간까지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나의 원정은 달콤한 꿀처럼 너무나도 짧게 끝났다.


지금도 물론 엑스재팬의 노래를 좋아한다. 잠시나마 우울하던 내 삶에 빛과 같은 존재들이었으니까. 2019년부터 2022년 여름까지 나는 그 전보다 더 내 삶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인문계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나는 확실히 문과다.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감성적으로 먼저 접근을 하는 비중이 높고 영화나 책, 드라마를 봐도 캐릭터 하나 하나, 그리고 그 캐릭터가 왜 그렇게까지 행동을 했을지에 대해 과정과 배경에 상당히 집중한다. (그리고는 울거나 분노하거나 어쩔 줄 몰라서 애간장이 녹을 때도 한 두번이 아니다)


처음엔 남들보다 한 발자국 뒤에 있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재미가 없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의욕도 앞서지 않는다 싶었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이를 먹고 있어서 더 그런 우울감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그게 맞다. 한번은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가끔 꽃다운 나이에 연예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혹은 나처럼 30대 중후반에서 어느 덧 40대를 지나 50을 바라보고 있는 한때 잘 나가던 연예인들?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더 가슴이 짠할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만큼 자신감도 떨어진다는 게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내가 영원히 열여덟살인 줄 알았고 평생 누나들만 따라다닐 줄 알았으니까. 앞으로 뭐를 해야 하지? 글쟁이를 계속 하고 싶기는 한데 뭘 더, 뭘 또 해야하지? 이런 저런 걱정이 참 많았던 것이다.







2022년 7월. 그날도 만사가 귀찮아 소파에 누워 넋을 놓은 채 티비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유퀴즈가 방송됐고 거기엔 레전드 락밴드로 불리는 살아있는 전설 '송골매'의 프런트맨 '구창모'와 '배철수'가 함께 나와 티키타카를 재밌게 선보이기 시작했다. 게슴츠레 뜬 두 눈이 점점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변하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려 하하호호 웃고 있던 것이다.


30대이지만 어릴 적부터 워낙 아날로그 감성을 좋아했던 지라, 송골매가 누구인지 기본 적으로는 다 알고 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포함한 <모두 다 사랑하리>, 그리고 구창모의 <희나리>, <방황>까지는 알고 있었다. 배철수는 당연히 알고 있었고 구창모 역시 기본 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70이라는 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구창모와 배철수의 투샷과 티키타카, 티격태격하는 두 분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너무 예뻤다.






자료화면으로 송골매의 리즈 시절 무대를 보여주는데 거기서 완전히 매료되었다. 한없이 젊은 구창모와 배철수, 그리고 송골매의 멤버들이 자료화면으로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던 것. 티비 속 자료화면의 송골매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어렸으니까. 노래가 이렇게 좋을 줄 다시 알았고 두 분의 옛날 투샷과 현재의 투샷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예쁘고 순수 그 자체였다. 거기서 나는 젊음을 느꼈다.


38년 만에 재결합 콘서트, 그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른다는 재결합 콘서트 소식을 알려주셨고 나는 그날부터 서울 공연 티켓팅 날짜 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 밤부터 송골매의 모든 노래와 구창모의 솔로앨범 노래들을 자장가로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엑스재팬의 노래를 좋아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서정적인 가사, 그에 맞는 멜로디였다.







평소 노래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고 특히나 미성의 보컬을 정말 좋아했다. (토시는 미성이 아니었지만) 어릴 때 잠깐 우리나라 밴드 '이브'를 좋아하기도 했었는데 이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락밴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중에 보컬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고.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를 제대로 들었던 그날 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들었는데 구창모의 첫 소절부터 두 눈을 번쩍 떴다. 일단 음색이 너무나도 미쳤고 맑고 깨끗한 미성, 고음, 하나부터 열까지 내 심금을 울려댄 것이다.


"와...이 사람 노래 진짜 잘한다...목소리가 진짜 좋다...이런 목소리 가졌으면 노래 할 맛 나겠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고 나는 구창모의 음색을 훔치고 싶을 정도로 첫눈에 반했다. 아니 첫귀에 반했다는 게 맞는 것 같다. 2022년 7월부터 내 어두운 삶에 환한 빛이 켜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23살 이후로 노래방을 혼자서 처음 갔다. (지금 생각해도 충격) 군대에서 노래방을 너무 많이 갔다와서 그런지 전역하자마자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 가끔 친구들이 졸라서 가도 아예 안 부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유퀴즈의 송골매를 보고, 구창모를 딥하게 알게 되고, 그 덕분에 거의 무려 13년? 14년 만에 나를 노래방으로 인도하다니...!? 그게 끝이 아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 사람 음색 갖고 싶다, 저 사람처럼 노래 부르면 가수 할 맛 나겠다" 생각을 들게 한 장본인이었는데 난생 처음 보컬학원을 끊게 된 것이다. (아 웃겨 진짜..ㅋㅋ)


보컬학원은 7,8개월 정도 다녔고 내가 생각해도 실력이(?) 많이 늘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주일에 최소 2번은 꼭 혼자 코인 노래방을 간다.







2022년 9월 추석 연휴. 송골매의 처음이자 마지막 단독 콘서트를 보기 위해 케이스포돔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만 이틀을 하고 부산, 대구, 광주, 인천까지 투어 한다는데 역시 노장은 죽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꽉 찬 체조경기장에 들어서니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보는 공연장 냄새에 심장이 쫄깃했다. 혼자 다녀온 콘서트였지만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온 내 또래의 젊은 관객들이 굉장히 많았다.


송골매 콘서트는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재밌었다. 2시간 30분 동안 그 흔한 게스트 하나 없이 일흔에 가까운 구창모와 배철수는 젊음과 패기, 열정 그 자체였던 것이다. 7080 콘서트와 락페스티벌의 딱 그 중간이라고 할까? 다녀오니 내 삶의 더 큰 활력소가 되었고 뭔가 터닝포인트가 되는 것만 같았다. 짱짱한 라이브를 여전히 자랑하는 구창모의 음색에 더 치어서 그날부터 구창모는 내게 창모형이 되었다.


집으로 오면서 창모형의 팬카페에 가입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검색을 했으나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다음에 검색을 했었는데 나오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검색해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집에 오자마자 창모형의 팬카페를 만들었다. <가수 구창모 네이버 팬클럽>. 누나들 따라다닐 때 내가 카페를 만들어서 대규모의 팬카페 <요정 베이커리>를 만들었을 때처럼...(ㅋㅋ) 송골매의 콘서트 덕분인지 한 분 한 분이 팬카페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신기한 게 가입하는 대다수의 팬분들이 다 나와 같은 늦덕이었던 것. 거의 나처럼 유퀴즈 때 입덕을 한 창모형의 팬들이었다.


부산, 대구, 광주 중 한번 더 혼자 가려고 했지만 시간이 안 맞아서 포기.

그런데 전국투어의 마지막 장소인 인천(송도)은 꼭 가야겠다 다짐했다. 나는 그런 게 있다. 내가 어딜 다녀왔는데 그곳이 너무 좋았으면 친구들을 데려가고 싶어한다. 서울 콘서트가 미치도록 재밌었던 지라, 친한 동생들 세 명에게 얘길 꺼냈다.


"얘들아, 내가 송골매 서울 콘서트 진짜 재밌었다고 했잖아, 근데 11월 인천이 마지막이거든? 진짜 재밌어서 그러는데 우리 같이 갈래?"


말을 꺼냈는데 세 명의 동생들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응! 가자!


"오빠가 재밌다고 하면 진짜 재밌는 거지!"







2022년 11월 12일 인천 송도.

전날 부랴부랴 수제 플랜카드를 만들었다. 누가? 나 혼자...(ㅋㅋ) 그냥 만들고 싶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하는 덕질이었고 너무나도 지루하면서 우울하던 내 서른 중반의 삶에 불을 켜준 사람이어서 그랬나보다. 밤 늦게 혼자의 힘으로 만든 비뚤비뚤한 플랜카드를 완성했다 (ㅋㅋ)

그리고 전국투어 콘서트 마지막 장소, 마지막날인 11월 12일이 되었고 내 차에 동생들을 태워 송도로 날아갔다.


"오빠, 플랜카드 되게 잘 만들었는데???"


"그래? 우리 자리 서브 무대 앞인데 창모형이랑 철수형이 봐줄까?"


그때 만약 창모형이 우리의 플랜카드를....

아니 내 플랜카드를 손가락으로 찜해주며 아이컨택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방구석 팬이 되었을까...?





우리 앞으로 전진해오던 서브 무대에서 창모형이 내 플랜카드를 발견했다.

대놓고 환하게 웃어주시면서 손가락으로 찜까지.

나는 그렇게 제2의 인생을 펼치기 시작했다.


서른 중반을 넘으면서 내 삶은 말 그대로 의욕 제로였다. 하는 것마다 재미가 없었고 스케줄이 없으면 한없이 잠만 잤다. 친구들을 만나도 재밌는 건 그때 뿐, 헤어지자마자 얼마나 크게 공허함이 밀려오던지...무서울 정도였다. 그때의 나는 불꺼진 방 같았다.

불 꺼진 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고 할까..







누가 불을 켜주면 좋겠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그 불을 켜서 방을 환하게 만들기엔 힘이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누가 들어와 내 방 불을 켜준 것이다. 그게 바로 송골매였고 그중에서도 창모형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창모형을 덕질한 건 아니었다. 창모형의 음색과 실력에 반하기만 했던 건데 노래가 워낙 좋으니 점점 그 노래를 부른 본체, 그러니까 창모형까지 좋아지게 된 것이다. 친구들이 물었다. 덕질하는 건 이해하는데 왜 하필 많고 많은 연예인 중에서, 그것도 가수 중에서 송골매를? 그중에서도 구창모를? 훨씬 더 젊은 연예인도 많고 가수도 많은데 왜 송골매의 구창모냐고.


대답은 늘 똑같다.

나도 모른다고.

그냥 그 순간에 방황하던 내 손을 잡아준 것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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