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퇴사하려고 하는가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앞에 서 있는 여자분이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게 인상 깊었다.
오늘따라 나도 책을 들고와서 좀 읽다가 졸고 있었는데, 내가 읽던 책은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김혜남 저)'였다. 퇴사하고픈 자에게 딱 맞는 제목이랄까.
앞의 분이 너무 책을 재밌게 읽고 있어서 제목을 훑어 보았는데, '파인만의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제목에 끌렸고, 책에 빨려 들어가 있는 게 분명한 그 여자분의 모습에 끌려서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진지하고 유능해 보였던 그 여자분은 아니나다를까 강남 직장인의 메카인 선릉역에서 내렸다. 분명 이과생이었을 거야.
그가 내리고 나서 나는 그 책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는데, 파인만의 유머러스한 행적들이 너무 재밌어서 몇 번이고 소리 내서 웃으면서 청량리까지 갔다. 출근길에 이런 식으로 멋진 정보를 얻다니! 이것이야말로 이웃과의 진정한 상호 교류가 아닌가!
퇴사하고나면 이런 세렌디피티는 아마 얻기 힘들겠지.
그래도 퇴사 하고싶다. 그러면 브런치도 더 많이 쓸 수 있지 않을까.
연휴는 브런치 만필의 적이다.
연휴가 끼면 회사에 안 나와서 (너무 좋지만) 브런치를 정해진 시간에 여는 건 불가능해 진다.
집에는 회사와 다른 종류의 일들이 산적해 있다.
회사에 나가는 것이 고통스러워진 시점과 맞물려 집에 있는 일을 하는 것은 보람차 졌기에, 별로 집에 속한 일이 힘들진 않다. 집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집과 관련된 일들이 집밖에도 있으므로 '집에 속한 일'이라 부르는 게 맞다 싶다.
몇 가지 숙원은 이사 오면서 커다란 박스 여덟 개에 넣어서 광폭 베란다에 적재해 둔 오래된 짐들을 해 치우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어려운 일은 베란다 양쪽에 있는 창고를 열어서 수십 년 묵은 짐들을 해 치우는 일이다. 그 당시에는 소중했던 물건들이나 지금은 쓰지 않는, 그 당시에는 추억이 밟혀서 버릴 수 없었으나 이제는 그 추억이 퇴색되어 그 의미 담긴 물건 없이도 견딜만 하게 된, 그런 물건들을 버려내고 싶다.
아빠의 유품이 담긴 큰 가방,
아들이 어릴 때 입던 귀여운 옷가지들,
내가 어릴 때 애착을 가졌던 옷이나 이불들 - 이건 엄마가 가져가라고 강제로 맡긴 것들인데 엄마의 추억 아닌가?
그런 물건들이 창고에 있다.
우리나라에 4계절이 있어서 창고에 물건이 더 많다.
겨울이 오면 장판과 전기 스토브를 찾아내고,
여름이 오면 모기장과 선풍기를 꺼낸다.
붙박이장이 큰 편이라 사계절 옷을 뒤집을 필요까진 없지만, 옷은 이사올 때 이삿짐 직원이 넣어준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대충 걸려 있다. 이걸 정리 전문가까지 불러서 깔맞춤하고 싶진 않다. 나도 시간이 없을 뿐, 할 줄 안다구. 게다가 내 필요에 맞게 제대로 넣을 줄 아는 건 내가 제일 아니냐구.
옷장 정리는 노동의 강도는 견딜만 하나, 묵묵히 옷장 자체에 집중할 만한 시간을 통째로 베어내어 가져본 적이 없다.
옷장 정리나 창고 정리는 과연 회사 다니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인가 생각해 봤는데, 회사 일이 연속해서 흘러가고 있기에 집에 있는 시간은 회사를 잘 나갈 수 있게 회복하는 데에 최우선적으로 씌여야 하는 게 문제이다. 내일 회사에 나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옷장 정리에 하얗게 며칠을 불태울 수 있겠지만, 오늘 옷장에 자신을 소각하고 내일 앓느라 회사에 못 나가고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해나가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회복이란 것도 몇 시간 채 안 되는 귀한 시간이고, 실제로는 집에서 냉장고 정리나 욕실 청소 등이 더 우선 순위로 올라오고, 그 다음엔 자녀의 학원비 결제나 보강 날짜 확인 등이 중요하다. 회복은 커녕 가족에게 신선한 음식을 먹이기 위해 해야 할 착한 요리를 할 시간과 체력도 모자라서 결국 배달 음식을 시키게 되고 집은 좀 깨끗해졌을 지 몰라도 우리 가족의 혈관은 청소가 되지 않는 그런 시간들이 '회사 다니면서 쉬는 날'의 패턴인 것이다.
쉬는 날이 계속된다면, 나는 어느 하루는 무리해서 옷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고, 집안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부동산 전문가가 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가 말하길 강남의 1평은 1억이라고, 내가 우리 집에서 정리를 통해서 불필요한 물건을 버려서 1평을 확보해낸다면 1억을 번 셈이 되는 거라고 했다. 정리의 중요성을 가치로 환산하다니, 아주 신박한 주장이었다. 퇴사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좀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얘기랄까. 집에서 정리를 잘해 낸다면 1억을 버는 거 아닌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