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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테오 Jan 01. 2020

#48 내 피, 땀, 눈물에 대한, 너의 무례

그때 너는 내 삶의 한 순간을 훔쳤다.


도벽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습관적으로 물건을 훔치는 버릇을 뜻한다. 즉 도벽은 습관이고 일종의 병이다. 다시 말하면 도벽은 고치기 쉽지 않다.      


남의 결과물을, 혹은 남의 생각을, 훔치는 자들도 도둑이다. 그러니까 남의 결과물이나 생각을 습관적으로 훔쳐 가는 버릇도 도벽이다. 즉 남의 결과물이나 생각을 훔쳐 가는 버릇도 고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Wayne Thiebaud, Cakes, 1963,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내 피, 땀, 눈물인 내 결과물이나 내 생각을 도둑맞는 일은, 내게 꽤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런 일은 내게, 웨인 티보 Wayne Thiebaud의 그림처럼 예쁜 케이크를 파는 가게에 겨우 줄을 서서 드디어 내가 케이크를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때, 내 앞의 누군가가 그곳의 케이크를 모조리 사가서,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빈 손으로 돌아서야 하는 그런 경우처럼, 그렇게 종종 있는 일이다.     


상사 A에게 온갖 비난을 받았던 내 작업은 선배 B의 이름으로 올라갔다. 내게 비난을 퍼부었던 그 상사 A는 선배 B의 이름이 쓰인 내 작업에 칭찬을 했다고 들었다.      

며칠 밤을 새워가며 힘들게 작업한 보고서는 선배 C의 이름으로 평가되었다. 선배는 그 보고서를 단 하나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게 있었다. 작성자의 이름이었다.      


아주 가끔 보고서의 실제 작성자인 내 이름이 거론될 때도 있었다. 이름만 바뀐 보고서가 질책을 받거나 그 안의 생각들이 혹평을 받을 때였다.     


이런 일이 내게는 꽤 자주 반복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고 해서 내 상처나 억울함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게, 내 피, 땀, 눈물이 들어간 결과물을 훔쳐 간 당신의 행동은, 도벽의 일종이다.


당신은 그 나쁜 습관을 고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 행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당신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당신들의 그 지저분하고 형편없는 행동은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몰상식한 행동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언제나 을의 입장이었다. 


내가 내 결과물에 들인 피, 땀, 눈물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내 자식을 내 자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고 해야 될까.

내 작업을 훔쳐 간 그들이 비열한 이유는, 그들은 내가 철저한 을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내 작업에 대해 내가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 피, 땀, 눈물이 들어간 결과물을 훔쳐 간 당신의 행동은, 너무나 무례했다.


그때 당신이 훔쳐 간 것은 내 결과물만이 아니었다. 당신이 훔쳐 간 것은 내가 그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수없이 고민하며 밤을 지새야 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신은 내 삶의 한 순간을 훔쳐갔다.          




Wayne Thiebaud, Dessert Tray, 1992-1994, San Francisco Museum of Modern Art, San Francisco



나는, 내 피, 땀, 눈물을 가져간 너(내게 무례한 행동을 한 당신에게는, 당신이라는 호칭도 아깝다)의 그 지독한 무례에 고맙다.


충격을 받아서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이 의외로 나를 단단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나의 능력을 믿게 해 주었다.     


너의 몰상식하고 무례한 행동으로, 나는 네가 훔치고 싶은 생각을 가진, 창의적이고 참신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너에게,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나 내 생각은, 웨인 티보 Wayne Thiebaud의 작품 <디저트 트레이 Dessert Tray>에 그려진 여러 디저트들처럼 탐나는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훔치고 싶은 생각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나의 생각에 대해, 나의 능력에 대해 조금 더 믿음이 생긴 것 같다.          



누군가는 계속 내 삶의 한 순간들을 훔쳐가려 할 것이고, 훔쳐가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그 도둑들이 훔쳐 가고 싶은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테니까 말이다. 다만 그 무례함에 나는 무례함으로 대응할 수 없다. 내가 무례하기에 그들에게는 훔칠 만한 것이 없다. 이제는 훔쳐 가면 찾아올 때까지 싸워 보려 한다. 그들의 도벽을 모르는 척 지나치기에, 이제 더는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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