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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을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을 알아주는 내가 되기를 바라며, 이스탄불에서 국제학교를 보내는 엄마

by 미네

10월 초순, 나는 9월과 마찬가지로 학교에 찾아갔다. 이번 달도 학교에 간 이유는 결국, 아들의 알레르기 문제 때문이다. 새 학기가 되자마자 나는 구구절절 메일로 이야기를 또 하고 또 메일을 쓰고, 그래도 이번 학기에 새로 온 학교 담당자인 Cara는 이야기라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이야기를 나눌수록 화가 누그려져서 이러다 정말 영어가 늘겠다 싶은 요즘이다. 딱히 아들이 작년보다 나은 것도 없고 알레르기 약도 여전히 먹고 있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학교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요즘 큰 위안이다.

작년에 지훈이의 알레르기 때문에 편지를 쓰면, 다소 딱딱한 답장이 돌아왔다. 솔직히 그 느낌을 이야기를 하자면, 거대한 대영제국의 함대가 오듯, 거대한 벽이 나를 막아섰다. 우리는 잘하고 있으니 기다리라는 답변이었다.

"으아! 아! 아! 아! 다 부숴버리겠다!"

성질 급한 사람은 아마 그 소리를 영어로 몇 번 들으면, 대가리 들고 아마 박치기를 할 것 같은, 아하하하하! 그렇다. 나는 작년에 벽을 보고 혼자서 또 욕을 참 많이 했다. 그런데 이건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는지, 작년에는 학교가 다소 고압적인 태도였는지 다른 학부모들의 반응도 대체로 그랬다.

그 고압적인 태도를 기억에 담아둔 이 소심한 어미는 이번에는 박치기를 하리라 하고 마음 먹지만, 아들을 보며 '참을 인' 한자를 다시 쓰고 소상히 지난 학기부터 현재 아이의 상황을 메일로 적었다. 그렇게 Cara와 나는 매 달마다 정기적으로 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고 우리는 오래된 친구처럼, 영어로 말하다가 기초 터키어도 서로 날리며 다분히 영국적인 외모를 가진 그녀와 학교 로비에 앉아, BIS의 점심 식사 메뉴를 살핀다. 나와 그녀는 앉아서, 아들의 알레르기가 더 심해지지 않도록 알레르기 재료가 든 메뉴가 서로 겹치지 않게 조정하고 그녀가 이를 급식소에 다시 전달하는 일이 매 달, 우리의 모임의 목표다. 어쩌다 보니 이 일로, 때론 다른 일로 학교에 가고 그리고 로비에 앉아 학생들과 선생님들께 어색한 인사를 하고 그러다 보면 지훈이를 가르치시는 다른 선생님과 아주 짧은 대화도 이어진다.



얼마 전, 아들은 생일을 맞이했다. 지훈이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직 자신의 생일도 기억을 못 한다. 뭐, 사실 나이를 먹은 나의 남편도 본인의 생일, 제사 등 자신의 집안 경조사를 기억 못 하니 고작 한국 나이 7살이 본인의 생일 기억하는 게 더 신기한 일이다. 여하튼 지훈이는 멀리 있는 친정 엄마의 조언에 따라 음력 생일날 집에서 조촐한 생일상을 차려주었다. 한국에서 이민가방에 가득 실어온 국산 미역과 튀르키예 소고기 안심(dana bonfile ; 다나 본필레)을 넣은 생일 미역국, 깨가 없는 초콜릿 케이크, 한국산 멸치볶음, 브로콜리 무침 등으로 차려진 상이었다. 미그#스에 미리 배달을 시킨 소고기에 한국산 미역, 어린이 멸치 등 이민가방에 들어있는 식재료가 출동하는 지훈이 식단이다. 보기에는 소박하지만 실제론 머나먼 한국서 가방에 고이고이 싸 온 피, 땀, 눈물이 들어간 식사를 준비했다. 그러곤 맛있게 냠냠! 생일 끝!

여기서는 아이의 생일 파티도 매년 크게 열고, 손님도 초대해서 잔치를 여는데, 사실 나란 인간이 그렇게 사교적이지 않은 탓에 아들 생일이라며 잔치라니!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데, 나는 이스탄불에서 내 성격대로 조용히 아들의 생일을 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에 가니, 아니! 지훈이를 일주일에 한 번 가르치는 Guven 선생님이 아이의 생일을 묻는 것이었다. 그녀는 지훈이의 생일을 기억하고 지훈이에게 생일이라고 축하한다고 이야기했더니 벌써 지났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동양인은 음력 생일을 챙기는 경우가 있고, 우리 집도 그러하다고 했더니 새로운 것을 다시 알게 되었다며, 아이의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해 주셨다. 그리고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과 지훈이가 잘 크고 있다고, 영어도 많이 늘었고 이제 정말 잘한다고 이야기해주셨다.


마음이 이상했다. 올 초에 아들의 알레르기를 알아채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리고 이제는 아이의 생일을 기억하고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는 그녀였다. 처음엔 그녀가 참 차갑고 냉철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저 내가 잘 아는 한국에 있던 나이 지긋한 부장 선생님 같았다.


내가 학교를 쉬곤, 나를 잘 아는 부장 선생님은 지금도 내게 다시금 학교로 돌아오라고 좋은 자리가 생겼고, 이 일을 같이 할 선생님은 나라고 생각한다며 가끔 연락을 주신다. 어느새 학교를 떠난 지 횟수로 아들의 나이만큼 되어가는 지금, 그녀는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연락을 주신다. 한창 일하던 그때는 소같이 일하는 나에게 가끔 향기 좋은 비싼 커피도 내려주시고, 좋은 것도 챙겨주시며 일을 더 줘서 미안하다고 하셔서 '이것 참, 더 소처럼 일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녀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내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내가 힘들어도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때의 내 마음을 알아주셨다. 일을 그만둘 때, 언제든 돌아오라고 우린 다시 만나니 걱정이 없다고 웃어주신 분도 그분이셨다. 그리곤 예상보다 오래 '지훈이 엄마'로만 살면서, 오랜 시간 나는 세상에 없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지훈이의 엄마'만 있을 뿐, 내 이름과 내 직업이 없어졌고, 나는 무임금 노동자가 되었다. 남편이 오면 아이를 맡길 수 있었고, 내가 아플 때도 아들의 알레르기 반응에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다시 소처럼 일했다.

지난 한국행에서 출산 후 처음으로, 내가 병원에 입원을 하고 지훈이가 지훈이의 생애 처음으로 내가 아닌 친정 부모님과 함께 잠을 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그저 누군가 이런 나를 알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남편은 예전부터 내게 말한다. 이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아이는 많이 컸고 예전처럼 그렇지 않다고 나를 위로해준다. 그렇다. 정말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잠깐 호흡을 크게 쉬고 힘을 빼도 괜찮다.




어느새 10월 중순에 접어들어 곧 있으면 국제학교의 가을 방학이 시작된다. 뭐 학교를 다닌 지 이제 한 2달이 되었을까. 학생도 학교에 가기 싫지만 선생님도 사실은 학교에 가기 싫다. 아하하하. 그래서 그런가 작년엔 회사 지원보다 자비 부담이 커서 그런지 주머니와 함께 마음도 가난해서 '이 놈의 학교! 또 방학이냐!' 하고 성질이 났는데, 지금은 '아, 잠깐 쉬었다가도 좋겠다.' 하며 아들의 가을 방학을 반긴다.


방학 동안 뚜벅이 엄마 따라 이스탄불 여행을 하자고 지훈이에게 말했더니, 이 놈은 알고 보면, 정말 독립운동가의 자손인가, '알겠어요.'가 아닌 왜 엄마와 함께 그런 곳을 가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달란다. 순순히 따르는 법이 없다. 한참을 듣고는 지하철을 타고 또는 택시를 타고 가는 여행이 제법 고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드는지 집에서 블록이나 마음껏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너는 참 나를 편하게 해 주는구나.'

'그래, 됐다. 나도 안 해! 나도 안 해! 흥!'


아마, 시간이 지나서 지훈이가 커도 이런 나의 감정과 노력을 이해하거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아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미역국은 먹었냐고 묻는 잔소리 많은 엄마로 나를 기억할 것이다.


아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묻는 그녀가 예전엔 참 차가웠고 지금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지듯,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서 아빠가 되고 자식을 낳아 이 감정을, 지금의 엄마를 세월이 많이 지나서 알아주면 참 고마울 것 같다. 그 마음이라면 이 녀석이 진짜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럼 참 행복할 것 같다. 나를 알아주는 일, 서로의 생일을 묻고 그때의 당신을 기억해주는 일.

그건 아주 천천히 그렇게 우리에게 올 것이다.


사진을 잘 찍어주는 서은, 지금은 여름이엄마, 우리가 꿈꾸는 일을 모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근데 나 너무 늙었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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