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지난 청춘을 되돌려주는 이스탄불의 서점에서(Remzi kitabevi)

by 미네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아이가 학교를 안 가는 방학 기간에는 아들과 함께, 그리고 때론 아들을 학교에 보내고 내가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집 근처 아크메르케즈라는 쇼핑몰이다.

에 가서 쓸데없이 쇼핑도 하며 이것저것 물건도 사고 싶지만, 뭐 주머니 털어 사봤자 그것을 입고 가는 곳도 아들이랑 가는 공원이고, 좋은 옷 입고 멋을 내서 사진을 찍어도 왠지 내 얼굴만 카카#톡 프로필 사진에 올리기엔, 이제는 좀 쑥스럽다. 그러다 보니 제법 꾸민다고 해도 결국 나의 발걸음은 집 근처 과일 가게, 마트, 아들의 학교로 향한다.

그렇다면 내게 가장 특별한 일과를 다시 고민해 본다. 역시 터키어 학원 갈 때 제일 예쁘게 하고 간다. 아하하. 참고로 나의 터키어 선생님은 여자다. 동료학생도 다 아이를 키우는 외국인 엄마다. 결국 꾸며도 큰 의미 없다. 모여서 육아 이야기를 영어로 터키어로 나눌 뿐이다. 아하하하.


무언가를 얼굴에 바르지 않고 가기엔 제법 거리가 있는 학원에 대한 예의로 집안일을 하다 젖은 후드티셔츠 대신 곱게 옷장에 개어진 스웨터에 내 머리를 넣는다. 하루종일 집에서 청소를 하고 밥을 하던 내가, 엄마가 아닌 나로 사는 삶의 유일한 일과다.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처럼 그저 그렇게 나는 걷는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나처럼 이스탄불에서 아이를 키우는 친구 덕분에 보스포루스 전망이 보이는 카페에 가지만, 결국 혼자 있고 싶은 순간에 조용히 앉아있기 가장 편한 곳은 결국 아크메르케즈 안의 서점이다. 갈색빛이 감도는 그곳, Remzi kitabevi 서점 구석의 제법 딱딱한 의자에 앉는다.

이제는 코로나가 끝난 것처럼 사는 이스탄불은 예전엔 천막으로 덮여있던 서점 안 카페도 이제 장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솔직히 내 입맛엔 너무 써서 잘 마시지 않는 터키쉬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앉아, 공짜로 책을 보는 미안한 마음을 커피값으로 대신한다. 역시나 서점 안 커피숍의 커피는 맛이 없다. 아하하하.




지금 이스탄불의 외국 서적의 베스트셀러는 나를 다시 과거로 데리고 간다. 파울로 코엘로의 '연금술사'가 아직 외국 서적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다. 2001년에 한국에 발간된 브라질 작가의 작품이다. 이 책은 발간 후, 몇 년 간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십 대의 나, 이 책을 읽었던 그때의 나는 대학생이었고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불안했다.


수능에 실패했고 재수를 하겠다고 집 근처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혼자 수강신청을 하고, 다른 학과에 가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과목의 수업을 듣고, 누구나 겪는 1학년 대학 생활과는 많이 달랐다. 학과 친구들과 술을 거하게 마시는 것 대신 혼자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러곤 나는 재수를 하겠다고 말해놓고, 수능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책을 봤다. 철학, 미술, 음악, 건축 등 1층 종합 자료실에 있는 책들을 쓸데없이 다 꺼내 보았다. 좋게 말해서 평범하지 않았고 다르게 말하면 좀 그렇다. 그때도 돌아이였다. 아하하. 도서관에 있어서 그런지 할 일이 책 보는 것이었고, 덕분에 대학 성적이 참 좋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나를 복학생으로 보았다. 푸하하.


혼자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계속 봤다. 대학의 낭만은 솔직히 없었다. 무언가 책을 보고 새로운 것을 이뤄가고 싶었고, 막연한 불안감에 쌓여있었다. 그때도 대학 도서관 구석에 혼자 앉아 있었다. 막연한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 난 이 책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작품들은 지금 다시 이스탄불의 서점에 외국 서적 베스트셀러 칸에 놓여있다. 이곳에서 나는 터키어가 능숙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래도 내게 조금 더 쉬운, 영문판을 꺼내서 보고, 그렇게 특출하지 않은 영어 실력이니 내가 한국에서 한국어로 읽었던 책들을 다시 영문판으로 읽어보는 것이다. 예전 그때처럼 20년 전의 나처럼 다시 같은 그때의 책을 읽게 된다.


나는 스무 살의 그때의 나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잡고 파울로 코엘로의 작품을 잡는다. 때론 오르한 파묵의 작품인 '순수'를 다시 읽으며 남자 주인공 케말이 완전 변태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의 사랑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지난 시절의 바보같이 순수했던 청춘의 나를 떠올려 본다.


그리고 다시금 그 책에 수록된 '순수 박물관'(The Museum of Innocence)의 입장권을 들고, 아들을 보내고 '순수' 박물관에 가볼까 하곤 생각에 잠긴다. 모두 내 나이 스무 살 무렵, 이십 대의 내가 읽었던 책들이다. 책은 그대로인데 나는 조금 변해 있다. 그동안 남편이 생겼고, 아들을 낳았다.


다만 그때의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새벽같이 나가는 남편에게 날이 춥다고 이불속에 누워 따뜻한인사말을 건네고, 아들을 깨워 두 손을 잡고 나서 버스를 태우고 난 후 아들이 떠난 그 자리에서 대충 아침밥을 챙겨 먹는 내가 있을 뿐이다.

서둘러 이불을 털고 집안일을 하고, 그리고 그때의 나와 달리 편안하게 혼자 거리를 걸어가 커피 한 잔을 시켜서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일 뿐. 대단한 변화는 없다.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나는 그때보다 혼자인 나를 좋아한다. 그 시간을 감사해한다. 남편이 회사를 가고, 아이가 건강하게 학교를 간다는 것, 그리고 그 순간 가끔 한국에서 오랜만에 걸려오는 전화를 반갑게 받는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친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니건만, 지난 금요일에 글을 올리지 못했다고 아들이 아파도 매주 한 글을 쓰자며 나를 재촉한다.

휴대폰의 알람이 울린다. 내가 어떤 일정이 있든, 내가 어떤 감정이든, 그 다음 일이 무엇이든 결국 책 속의 나의 감정은 어느새 멈추어지고 나는 다시 집으로 간다. 그동안의 혼자인 시간을 감사하며 다시 집으로 바쁘게 걸어간다. 행복하다.

아들이 아프지 않고 잘 자는 밤, 내가 다시 나의 글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이란 결국 비스킷 깡통을 하나씩 비우는 일이다.


지난 금요일 아들이 아팠고 밤새 잠을 자지 못해 병원에 데리고 갔다. 한동안 학교 잘 가서 기뻤는데, 그 밤부터는 나 또한 제대로 못 잤다. 그런데 병원에서 그래도 제법 아들의 증상을 잘 알고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새로운 의사를 만났다. 새로운 약을 건넨다. 구# 번역 기능을 사용해 처방한 약을 한 번 더 확인한다. 그래, 또 먹여보자. 그럼 내게 다시 좋아하는 맛을 꺼낼 날이 오겠지. 그래, 그렇지.

아들이 알레르기 증상에 밤새 아이가 잘 자지 못하는 날이 오면, 가끔 이 놈의 깡통을 다 집어던지고 울고 싶지만, 그래도 그 감정에 너무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아들과 그리고 남편과 싱거운 농담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어떻게 셋이나 키우신 것일까.



가끔 오늘 하루가 맛없는 비스킷 깡통을 뒤지는 날이겠지만, 그래도 그런 하루도 끝이 있다. 우린 그저 그런 하루도 잘 살아내야 한다.

새벽에 아들을 안고 있다 보면, 엄마가 참으로 보고 싶다. 한국은 지금 아침이겠구나. 아버지는 지금 회사에 이미 출근해 계시겠지. 집 앞에 모래 놀이터 공원에 묻어둔 우리 집 달팽이는 이 추운 겨울, 땅 속에서 잠을 잘 자고 있을까. 꽁꽁 언 땅바닥에 묻어둔, 이 겨울 하늘나라를 간 그 녀석도 떠오른다.


가끔 맛없는 비스킷만 집어 올리는 날, 그리고 다시 아들과 남편을 마주하는 일상에서 그 비스킷의 맛과 상관없이 늘 먹던 것처럼 습관적으로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나 이 모든 평범한 일상이 스무 살의 파도 같던 그때의 격정적인 어린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이뤄낸 그 지루하고 답답했던 오늘들이 모여서 지난 날의 나와 당신이 이뤄낸, 아주 소중하고 충실하게 반복된 약속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다시 생각한다.


아침에 일어나 내가 어떤 감정이든, 그 사람을 위해 따뜻한 밥을 차리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회사로 그리고 학교로 가는 그 성실함에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 생각한다. 가끔 굳이 그런 말을 안 해도 하는 사람에게 '미안해요.', '안녕하세요.' '고마워요.'라고 말하는 것도 그 약속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비스킷통을 다 먹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맛이더라도 끝까지 내가 먹어내야만 통을 비워낼 수 있는 것처럼, 지금의 내 사랑은 진하게 점철된 이스탄불의 차가운 바람 속의 '순수'의 케말의 사랑과는 너무나 다르지만, 이 반복된 일상 속의 마흔 즈음의 내 사랑은 그때의 스무 살만큼 충분히 따뜻하고 아름답다.

'알람이 울렸다. 어느새 아들 올 시간이다.'



덧붙임)

'Remzi kitabevi'는 우리나라의 교#문고, 알#딘과 같은 서점입니다. 어린이 영어서적은 영국 출판사가 주류를 이루고, 수입서적은 한국보다 책값도 다소 비쌉니다. 그래도 백과사전류는 한국보다 다양하니 굳이 한국에서 구입해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외에도 D&R, nezih 등이 있습니다. 외국서적은 주로 remzi에 많고, 잡지나 영문법 기본서, 어린이 영어동화책은 D&R에 많습니다. 이스탄불의 서점에서 아이와 좋은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먼저 어른이 책을 읽어야 아이도 읽습니다. 아하하하.


매거진의 이전글모든 것은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