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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쿠키 Aug 20. 2021

빈틈 투성이의 당신이 내 롤모델입니다

아버지의 은퇴


 

 나의 아버지는 그야말로 지독한 완벽주의자다. 어릴 적 나는 아빠가 무언갈 시작한다는 자체를 두려워하던 기억이 생생하니 말이다. 건강 챙기자고 시작한 운동에도 여지없이 등수가 붙었고, 취미생활마저 그의 삶에선 달리기 경주 같았다. 플랜 A, 플랜 B는 들어봤어도 플랜 Z를 들어보았는가. 일처리에 있어서도 그의 머릿속엔 끝도 없는 다음 플랜들이 줄지어 있었으리라 감히 확신한다. 분명 나에게 강요된 건 없었을지라도 큰 욕심 없이 느슨하고 허점투성이인 나는 어린 시절 한 번씩 스스로 숨이 콱 막혔던 것 같. 그렇게 아빠는 이름 있는 중견기업의 임원 자리에 올랐고 과제에 대한 실패가 없는 인물이란 평가가 쌓이며 승승장구했다.

 아빠의 사회적 성과가 정점을 찍는 것이 내 피부로 느껴지던 순간까지도 난 한 번도 그를 위인 삼은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집 책장에 흔히 꽂혀있는 위인전 전집이 눈에 띄는데, 살아가면서 얼굴 한 번 볼 일 없을 그 인물들은 수많은 이들의 롤모델이 된다. 뛰어난 업적이나 특별한 서사가 담긴 그들의 인생 스토리는 공개적이지만 우리는 그들의 사적인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는 것도 재미있게 느껴진다. 선별된 소재로 채워진 위인전에서 만나는 세종대왕과 코 고는 소리를 공유하며 한집에 사는 나의 아빠가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까지 나에게 롤모델은 세종대왕도 아빠도 아닌 스페인 세비야 어느 골목의 디저트 카페 사장님이었음은 또 하나의 비밀스러운 고백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견고한 독수리 같았던 그가 은퇴하기가 무섭게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실수라는 단어가 용납 안되던 호랑이가 까마귀 고기를 먹나 싶은 할아버지로 내 앞에 있다. 긴장 풀린 맹수는 멍 때리는 취미까지 생긴 순한 사슴 같았다. 숨 가쁜 삶 속 그의 낙이었던 버킷리스트의 여행지마저도 가장 꿈꾸던 곳은 꿈도 못  형편없는 건강상태가 되었다. 처음엔 그 급격한 변화에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우리를 위한 치열한 삶이었다고 치부하기에는 그 시간 동안 우리에게 남은 생채기 또한 분명했기 때문이었을까. 한방에 꺾여버린 날개로 동력을 잃을 아빠가 걱정되서였을까. 일평생 못해낼 것이 없어 보이던 야생의 사자에게서 조금씩 연민 비슷한 감정을 느끼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결국 나에게는 내 자리에서 당신을 천천히 바라보게 하는 시작이었다. 그의 '빈틈'이 늘어날 때 난 한 발짝 물러난 자리에서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고 감히 조금은 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절한 전장에서 제법 승리를 이루고 이빨 빠져 돌아온 집은, 이제 그가 낯설단다. 그때는 이미 아빠 대신 가정의 온기를 채우느라 힘을 쏟던 현숙한 아내도 늙어버렸다. 어쩌다 보니 바람 빠진 그가 온전히 쉴 만한 공간은 없다. 어느 방 하나 편안히 들르지 못해 종종 대는 그를 발견하고, 나는 그때야 그가 만들어준 튼튼한 집이 보였다. 자식들과 강아지도 엄마 주변만 둘러쌀 때, 손주를 끼고 웃는 그의 바보 같은 얼굴을 보며 안도했다.

 그의 찬란한 시절이 지나가고 벗어진 머리에 초라한 손으로 받아 든 소박한 명절 선물이 화려한 선물더미들보다 값졌. 때론 그 태산 같은 어깨가 그립지만 작아진 어깨라서 내겐 가깝고, 근사한 양복차림의 그는 잊혀가도 줄무늬 단벌신사의 당신이라 친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빈 틈이 늘어갈수록 내게 당신은 높아져갔다. 오랜 세월의 벽은 여전히 두꺼워서 아직도 한마디 말마저 고민하다 웃고 마는 나지만, 어느 순간 제법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모라는 자리의 무게감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두 아이의 부모가 되었을 때 즈음엔 적어도 당신보다는 괜찮은 부모로 살고 있을 줄 알았으니까. 또한 당신보다 잘하는 것 하나 없었지만 굳이 당신처럼 빡빡하게 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도 부모가 되었고 '틈'이라는 공간 속에서 약해진 부모가 보일 때쯤, 내 아이들에게 딱 당신만큼만 튼튼한 존재로 있어주고 싶어 졌다. 내가 살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떨어져도 벌써 더 밑으로 내려가 푹신한 매트가 되어 나를 받쳐 줄 사람이 부모란 걸 알게 되었다. 서투른 부모 탓으로 넘기면 그만이던 끈질긴 나의 결핍은, 당신이 준 단단한 뿌리 위에다가 내 삶에서 채워보리라 거창한 결심까지 이르게 했다.



 지나고 보니 알겠다. 비 오는 날이면 그 축축한 냄새 한 번 맡겠다고 아이들과 신나게 빗물 튀기는 창문을 열어보는 나는 꼭 그를 닮았다. 때론 부모의 아낌없는 투자도 구속 같았는데 지금 내가 자식들한테 쩔쩔맨다.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였을 토끼 같은 자식 둘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당신을 무척이나 닮아있음을 깨달아간다. 당신이란 지지대 위에서 성장해가고, 당신을 닮아가는 그 인생도 꽤나 괜찮은 여정임을 알아간다. 이제라도 나에게 '틈'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오늘도 수줍은 딸은 당신의 등 뒤에다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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