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엄마의 다음 계절
아빠, 엄마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처음으로 아빠, 엄마를
그냥 ‘부모님’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가게와 공장을 지켜오신 두 분.
어릴 땐 그게 너무 당연한 줄만 알았습니다.
아빠, 엄마는 늘 일하고 있었고
우리는 늘 그 품 안에서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부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를 쉰다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인지,
내 몸보다 아이의 하루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고되고 외로운 일인지.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파도 멈출 수 없었고,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힘들어도 버텨야 했던 삶.
그 삶을
하루 이틀도 아닌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묵히 이어오신 아빠, 엄마를
저희는 진심으로, 깊이 존경합니다.
그런데 요즘 문득
아빠, 엄마의 마음이
조금은 허전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40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붙잡고 살아온 일을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 손으로 내려놓아야 할 때,
그건 ‘마무리’라기보다
어쩌면
지는 느낌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버텨온 시간이,
내가 살아온 날들이
한순간에 허무해지는 것 같고
이제 나는 무엇으로 불릴까,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이런 글귀를 보았습니다.
“꽃잎이 지면 다 끝난 줄 알았어.
근데 그 꽃잎이 지고 나면 또 열매가 맺히더라고.
내가 그걸 까먹어버렸어.
내 꽃잎만 진다고
서럽고 아쉬워만 했지.
내가 그걸 몰랐네.”
이 문장을 보는데
자꾸 아빠,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꽃잎이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해오던 역할이 끝나는 것 같고
내가 지고 있는 것 같아
괜히 서럽고 허무한 마음이
스며드는 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꽃잎이 지고 나서야
비로소 열매가 맺힌다는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동안 꽃을 피우느라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나무가
이제야
자기 몫의 열매를 품는 것처럼요.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책임에서 잠시 내려와도 되는 하루,
누군가를 위해 버티지 않아도 되는 인생.
그건 비어 있는 시간이 아니라
이제서야 시작되는
다른 형태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아빠, 엄마의 인생은
지금 끝나는 게 아니라
더 깊고, 더 단단한 계절로
천천히 넘어가는 중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빠, 엄마의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고
화려한 길도 아니었지만
그 어떤 인생보다 단단했고
그 어떤 선택보다 위대했다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2025년 12월 31일,
아빠, 엄마는
긴 시간을 정리하고
한 시대를 내려놓습니다.
누군가에겐
그저 일을 그만두는 날일지 모르지만
저희에겐
아빠, 엄마의 청춘과 체력과
말로 다 하지 못한 사랑과 희생이
조용히 한 장 덮이는 날입니다.
이제는
정말 쉬셔도 됩니다.
일정에 쫓기지 않는 아침,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떠나는 여행,
좋은 풍경 앞에서
아무 걱정 없이 웃는 시간들.
그 모든 순간을
마음껏 누리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저희의 울타리가 되어주셨잖아요.
비 오면 막아주시고
바람 불면 먼저 맞아주시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내려오셔도 됩니다.
이제는
저희가 울타리가 되어드릴게요.
아빠, 엄마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알기에
앞으로 걸어가실 길은
부디 가볍고,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빠의 삶을,
엄마의 삶을,
두 분의 인생을
진심으로, 깊이 존경합니다.
이제부터는
꽃잎이 아니라 열매의 계절을
마음껏 살아가세요.
아빠,엄마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