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과 공공기관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해 보았다. 삼성에선 주 업무가 물품지원이었고, SK와 공공기관에서는 예산이었다. 두 곳 모두 경험한 예산업무를 기준으로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업무차이를 설명해 보겠다.
예산(豫算, Budget)은 한 기관의 수입과 지출을 구체화시킨 계획으로 회계연도를 기준으로 매년 작성하게 된다. 최종 승인된 예산은 해당연도의 기준이 되고 기관 운영의 기본 방침으로 사용된다. 중요성이 큰 만큼 대기업과 공공기관 모두 예산 편성 지침이 Top-down 방식으로 명확하게 내려온다. 대기업의 경우 지주회사(SK는 SK Holdings), 공공기관의 경우 정부(구체적으로 소관 정부부처)에서 내려온다.
예산업무는 크게 편성과 집행으로 구분할 수 있다. 큰 틀은 대기업과 공공기관이 비슷하다. 예산 편성 지침을 받고 예산을 편성하여 상부기관에서 승인을 받는다. 그렇게 승인받은 범위 내에서 예산을 집행하고 실적을 관리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 곳의 차이를 만날 수 있다.
첫 번째 차이는 자율성이다.
대기업의 경우 상당한 자율성이 있다. 매출원가, 인건비 등 전년도 실적이 있는 부분에서는 지침이 명확하게 정해지기 때문에 예산편성 시 자의적으로 처리할 부분이 적다. 하지만 사업목표를 세우면서 폭넓은 자율성을 얻을 수 있다.
실제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근무한 발전소의 경우 전기와 열(Steam)을 판매했다. 전기의 경우 국가 전력수요를 늘릴 수 없고 생산된 전기는 한국전력에서 전량 매수하기 때문에 특별한 수요관리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열은 인근의 공장에 공급하는 것이었다. 즉 수요가 늘어날 수도 있고 줄어들 수도 있는 영역이다. 이때 사업계획과 예산편성을 통해 '수요증가를 위한 인프라 구축'을 신규 사업으로 승인받는다면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다.
물론 사업계획의 타당성과 수익성은 기본이 되어야 하고 최선을 다할 때 달성가능한 수준이라는 점을 납득시켜야 한다. 이러한 목표는 SUPEX 추구라는 SK의 이념과도 부합되기 때문에 사업분야와 계열사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준비를 한다. 지주회사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지원해 준다. SUPEX에 걸맞게 높은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한다면 그 회사와 구성원은 높은 평가와 함께 두둑한 성과급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공공기관은 아주 다르다. 자율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예산편성지침에는 물가인상률과 임금인상률이 지정되어 있다. 심한 경우에는 전년대비 예산증가율의 상한을 둔다. 만약 '전체 예산 증가율 2% 이내로 편성'이라는 지침이 내려온다면 물가와 임금 상승을 제외하고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아닌 이상 수입과 지출의 합을 '0'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 너무 많은 수익은 공공기관의 목적에 저해되고, 너무 낮은 수익은 기관 운영의 적신호로 보이게 된다. 대기업 예산에 비해 한계가 명확하고 자율성이 낮다.
두 번째 차이는 운영주체이다.
대기업은 운영주체가 바뀌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처럼 계열사 간 매각, 인수, 합병이 상당히 자유롭기 때문에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룹사 내에서의 운영주체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아는 재벌가와 지주회사가 대기업의 운영주체이다. 그들의 목표는 수익과 성장이기 때문에 예산을 운영할 때 그 부분에만 집중한다.
반면 공공기관은 운영주체가 바뀐다. 대통령이 누군지, 다수 정당이 어딘지가 중요하다. 즉 정치의 판도에 따라 예산의 방향성이 거의 180도 바뀌게 된다. 대선이나 총선이 끝나면 예산 관련 수많은 이야기가 언론에서 쏟아진다. 깊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성장이냐 분배냐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전 정부에서 정한 정책 방향은 다음 정부에서 대부분 바뀌게 된다.
세 번째 차이는 운영과 관리의 엄격성이다.
대기업은 자체 감사제도를 운영하면서 예산을 관리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후 관리이다. 회계연도 중에는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예산 집행이나 증빙에 관여하지 않는다. 시스템 적으로 관리하는 기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감시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공공기관의 업무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적법한 절차로 업무를 진행하였음을 증빙하고 기록하고 보고하는 게 공공기관에서 하는 업무의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수증 하나, 문서 하나마다 수많은 단계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렇게 적법한 절차로 마무리된 후에도 자체감사, 상위 정부부처의 감사, 국정감사 등 끊임없이 잘못한 일을 찾으려고 애쓴다. 국가의 예산을 쓰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직원의 입장에서는 업무를 하면 할 때마다 옥죄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가감 없이 적고자 했는데 다시 보니 대기업이 좋다는 식으로 적혀있는 것 같다. 실제로 내가 근무를 할 때는 대기업의 업무 스타일이 나에게 맞았다. 하지만 이는 나의 의견일 뿐이다. 대기업은 자율성을 주는 와중에 업무가 끊임없이 생기고, 공공기관은 적법한 절차를 강조하는 와중에 업무 강도가 낮다. 기관의 존재 이유에서 시작하는 차이점이기 때문에 좋고 나쁨보다 다른 점을 확인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