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회사에서 짐을 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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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30년 넘게 다니던 회사에서 짐을 싣고 집에 왔습니다. 그래도 말일까지는 다니는가 했는데 아마도 내일이면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가 봅니다. 한결같이 단 하루도 회사가 가기 싫다든가, 출근하기 힘들다든가 하는 흔한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성실하게 다닌 30년이었는데 곁에서 보기에도 서운하리만치 하루아침에 짐 정리를 마치고 퇴직을 하니 좀 허탈합니다.
남편은 아내와 달리 매우 소박한 사람입니다. 아내는 꿈만 커서 현실을 사는 게 버겁다면 남편은 꿈은 소박하고 현실을 열심히 사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퇴직하면 소박하게 집에서 TV를 보겠다며 몇 년 전부터 커다란 TV를 거실에 들여다 놨습니다. 그래서 한바탕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좀 더 진취적인 취미 생활을 생각하면 안 되겠냐, TV 사다 놓으니 네가 제일 열심히 보더라, 있으니까 보는 거다...등등 아주 유치 찬란한 싸움이었습니다.
하필 그때 코비드 상황이 되며 그 거대한 TV로 온라인 예배를 실시간 현장 예배처럼 매우 생생하게 잘 드렸습니다. 은혜받을 때는 ‘여호와 이레’ 주님이 예비하셨다고 외치다가, 유튜브 여행 채널에 코를 박고 있는 남편을 보면 또 잔소리했습니다. TV를 통한 양가감정이라니.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기다리고 기다려서 경차를 한 대 구매했습니다. 사양은 고급이지만 경차의 모든 장점이 있는 차라며, 퇴직하면 경차가 필요하다며 아내에게는 상의를 빙자한 통보 같은 걸 하면서요. 그렇게 일찌감치 남편은 퇴직할 자신을 위해 차근차근 선물과 보상을 준비했습니다. 퇴직하면 나에게 이것도 못 해주냐. 이러면서 하나둘씩.
정작, 하루아침에 짐을 싸서 방을 빼고 보니 본인도 당황스러운가 봅니다. 직함과 이름이 새겨진 명패를 어디 둘 곳도 없고 해서인가 떡하니 그 커다란 TV 아래에 둔 모습을 보는데 좀 웃픕니다. 퇴직을 위해 미리 준비한 선물과 퇴직 후에 남은 흔적이 만나는 모습이랄까요.
공식적인 퇴직 첫날.
집에서 좀 편히 며칠 쉬라는 아내의 만류에도 남편은 가방을 싸서 인근 도서관을 가겠다고 나섭니다. 그런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아내는 한 마디 했습니다.
-여보, 나 친구랑 일주일간 제주도 좀 다녀올게.
-엥? 회사는 내가 다녔는데 왜 당신이 제주도를 간대.
-같이 갈래? 난 당신이 퇴직하면 집에 혼자 맘 편히 있고 싶을 것도 같고, 나도 30년 넘게 당신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해서 보상 좀 하는 차원이야. 다녀와서 함께 여행 가자고.
아무리 봐도 바뀐 것 같습니다. 문구점 가면 아이들도 남자와 여자의 구매 스타일이 다르다더니 우리 집이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여자아이들은 사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와서 바로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 갖고 가는 반면, 남자아이들은 말 없이 여러 번 와서 한번 씩 봐 놨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큰돈을 내고는 바로 사 가는 스타일이라고 예전에 동네 문구점 사장님이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애들도 그렇다는데…… 뭔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뀐 것 같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그렇게 테이프를 끊어야 소심하고 소시민적인 남편이 자신을 위해 과감히 뭔가를 할 것 같다는 경험에서 우러난 처사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짐을 싸기 시작합니다.
문구점에 온 남자아이 같은 아내도 일주일간 방을 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