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티 Sep 22. 2024

Missing You?

동굴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

  길고 지리한 명절을 보내면 나는 진이 굉장히 보고싶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회의실에서 나오는 진을 보고서야 내가 연휴동안 단 한 번도 진을 생각하지 않았단 걸 알게 되었다. 연휴 전까지만 해도 사수 진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 같은데. 긴 연휴에 내가 착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사무실도, 나도, 진도 모두 아무 일 없었던 그 상태다. 원점으로 돌아갔다라고 할까. 분명 그 날 진은 내게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다 가게 문 닫는 시간에 걸려 허무하게 발걸음을 돌렸는데. 그리고 각자 헤어져 집으로 갔고 다음날부터 길고 무덥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휴였다. 그게 전부였다.


  내가 나를 모를 리 없다. 나는 누군가를 넘치도록 좋아하거나 사랑한다는 감정 따위를 믿지 않던 자이다. 왜? 언젠가는 이별할테니까. 그런 감정 소모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청소년기까지였다. 오히려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내 주위에는 남자친구라는 명목으로 계절마다 옷이 바뀌듯 누군가가 늘 새롭게 교체되었다. 말하자면 주기는 짧고 사람은 다양하게 만나던 시절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요즘은 주기는 짧게 여러 명 만났다는 말을 좀처럼 자랑삼아 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꼭 좋아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의무감 같은 게 생기는 것도 싫은데 누군가 좋아지려고 하다니. 조아 기피증(누군가가 좋아지는 병을 내가 부르는 말)이 불안해서 서서히 발동을 하려던 던참이었다. 그동안 졸업하고 변변하게 사귀는 사람 하나 없이, 특별한 직업도 없이 부모님 눈치를 온 몸에 받으며 여태껏 버티다 삼촌 회사에 낙하산으로 들어오자마자 조아기피증이 공격을 받는 것 같아서 불안하기도 하고 살짝 묘한 기분도 들었는데 며칠 새 날아가 버렸다. 계절마다 바뀌는 남자 친구를 보며 동기들은 내 앞에서는 부러우니 한 턱 내라고 시끄럽게 굴었지만 내가 화장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뒤에서 내 흉보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리곤 했다. 그 후로 나는 남자친구를 여자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출근하고 벌써 2시간 25분이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진은 회의에서 나온 이후로 마음만 먹으면 눈이라도 들 수 있는 저 낮고 낮은 파티션 아래 코를 박고 계속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파티션 위로 아는 체를 하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 눈이 있어 그만 두었다. 아니 연휴동안 잘 지냈냐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거 아냐? 그 때 토니가 내 파티션을 톡톡 두드리며 모니터를 손으로 가리켰다. 얼른 사내 메신저를 봤다.

  -자기야, 연휴 전에 올린 회계서류 중에 중대한 오타가 발생해서 지금 진이 제정신이 아니래. 연휴동안에도 사무실에 불려나와서 엄청 시달렸다는 소문이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해. 난 오늘 반차라 점심시간에 퇴근할거야.

  토니는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깃털처럼 가볍다. 어쩔 땐 부러운데 그게 또 쉽게 안 된다. 연휴 끝에 반차라니 아무도 생각지 못한 기발한 생각 아닌가.

  근데 가만히 있어봐라. 연휴 직전 회계 서류라면 혹시 내가 올린 거였던가? 설마. 나는 문서함을 뒤졌다. 제발 내가 올린 결재서류가 아니길 바라면서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법 큰 건인데 몇 십억 단위였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어. 진도 확인했잖아. 맨 마지막 날짜의 진과의 공유 파일을 열었다.

  -오! 마이 갓!

작가의 이전글 월미도에 가 볼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