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소리 없는 아우성

by Kite

우리 집 첫째,

모범생,

반장,

누나,

언니,

첫 손주...


수백 장의 상장들이 코팅되어 진 채 서랍에 꽂혀 있다.

봐도 아무 감흥이 없다.

하나도 자랑스럽지가 않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릴 수 없었다.

유치원을 다니던 때 담임 선생님이 엄마에게 나에 대한 칭찬을 했다. "정리정돈을 잘하고 아이들이 잘 따라요."

그 때 부터였을까.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아이의 수 많은 행동 중 하나일 뿐인 순간이 나 라는 아이의 성격 특성이 되었고, 나아가 그 것이 곧 나 가 되었다.

점점 그렇게 아무 흠이 없는 완벽한 모습이 나를 덮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어느 날, 가정통신문을 읽은 부모님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딸이 반장 선거에 나가서 할 말을 대본으로 열심히 적는다.

어머니는 아이가 대본을 잘 외우는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반장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아이는 교실 강단 앞으로 나가 달달 외운 대본을 읊는다.

개표를 하고 칠판에는 아이들 이름 옆에 바를 정 한자가 오른쪽으로 점차 뻗어나간다.

덜컹, 반장이 되었다.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반장이기 때문에 학급 친구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선생님들의 말씀을 잘 따라야 하고,

친구들을 잘 이끌어야 하고,

청소 감독과 관리를 꼼꼼히 해야 하고,

수업 시간에 학급 친구들이 수업에 잘 집중하는지 계속 확인하며 학급 분위기를 잘 조성해야 한다고 한다.

어느 새 반장이라는 칭호가 내 이름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반장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어린 친구들은 청소를 하기 싫어했고, 수십명을 타이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친 반장은 혼자 청소를 마무리해야 겠다는 다짐을 한 채 홀로 복도 계단을 몸으로 웅크린 채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한 층 한 층 고사리 손으로 걸레를 힘껏 쥐어 닦는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걸어간다.


한 학기가 끝나고 두 번째 학기가 시작하자 또 선거를 열었고 또 반장이 되어버렸다. 뭔지는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지 라는 일념으로 닥치는 대로 했다.

그렇게 4학년 1학기, 5학년 1학기, 2학기 전교부회장, 6학년 1학기, 중학교 1학년 1학기, 2학년 1학기, 3학년 1학기,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3학년 1학기.

약 10년 동안의 연례행사였다.


수업시간 태도가 안좋으면 선생님들은 당장 반장부터 찾고 꾸짖는다.

수업시간 분위기를 잘 조성하기 위해 태도가 좋지 않은 친구들을 단속하면 거침없는 욕설들이 뒤통수로, 앞통수로 날아온다.


반장이란 자리에 놓인 이상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학급 전체가 무시당하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잔뜩 긴장을 한다.


반장이기 때문에.

반장이니까.

넌 반장이잖아.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첫째이기 때문에.

첫째니까 당연히 잘해야지.

넌 맏딸이잖아.


숨이 막혀온다.

어린 아이는 완벽한 모습을 만들어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감추어 살아간다.


시험에서 100점을 받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한 때,

반에서 1등을 놓쳐 무릎 꿇고 혼나던 때,

웅변대회 리허설 중 반복해서 틀려 손등에 피가 흐를 때까지 긁히며 100여명 앞에서 울었던 때.


그 수많은 날들이 내 속에서 소리없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었다.

반장하기 싫다고, 삶이 힘겹다고, 나도 철부지 어린 아이 답고 싶다고, 나도 어린 아이라고, 내 말 좀 들어달라고.


감정을 밖으로 꺼내 표출할 기회가 없었던 나는 점점 만들어진 가짜의 모습에 나를 더 붙이기 시작했다.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철저히 가면을 썼다.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을만큼 너무 멀리 와버린 걸까.

오늘도 나의 존재는 나에게 소화불량이다.


애어른과 성인아이.

나는 나를 몹시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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