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 다섯번째 글(폭력성이 있어요)

젊음이라는 보물을 그냥 내어주었다.

by Kite

오래도록 나는 단편영화 속 비련의 여주인공이었다.

첫 남자친구와의 이별은 내게 많은 과제를 남겨 주었다.


부모와 나 사이에 잘못 형성된 애착관계,

치료가 필요한 엄마의 내면과 그 속에서 피어난 여러 부정적 감정과 행동 양식을 고스란히 받아 내재화 시킨 나,

평생 불편했던 가족에 대한 분노와 이로 인해 반복되는 신체화 증상,

예상했던 대로 남자친구와의 만남에 대한 격렬한 반대.

그 반대에 저항하자 내게 너무 드센 엄마는 그 날 내 목을 당신의 두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내가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불끈 쥔 두 주먹은 나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고 집안 거실과 복도를 빗자루마냥 끌고 다녔고 가슴과 배는 시퍼런 멍으로 가득찼다.


나는 그 날 죽었다.

그래서 나의 시간은 그 날에 멈춰 있다.

그렇게 장장 1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버렸다.


거울을 보니 눈 아래에 골이 생겼다.

주름을 걱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몽땅 사라져 버렸다.


힘들수록 더 이 악물고 독립에 힘을 썼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 약했다.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긴 세월을 보내고 나니,

내가 본래 지니고 있던 나의 밝음과 건강한 자신감을 잃어 버렸다.

덤으로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란 두려움도 생겼다.

함께 울고 웃던 친구들도 곁에 없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니, 환히 웃는 나의 모습이 보인다.

과거의 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젊음을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말이 있었던가.

청춘, 이름만 보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 말이 그토록 찬란한 줄 미처 알지 못한 채 그저 내어 주기만 했다.

온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내 것인데, 나의 젊음인데, 아까운 줄도 모르고 그 보물을 지키지 못했다.

내가 세상 살이에 약지 못한 걸까,

아님 아직 나만의 단편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줄 착각하는 걸까.


내 안에 어린 아이를 키우기 위해 내면을 열심히 단련했다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여전히 어리고 철이 들지 않았다.

내면에만 너무 치중한 나머지, 신체의 건강을 놓쳐 버렸다.


그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던 걸까.


이제는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

슬픈 이야기 한 편은 막을 내렸으니,

지금부터는 삶을 즐기는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내 안에 괴짜스러움, 엉뚱함, 해맑음을 살린 코미디 한 편이 쓰여졌음 좋겠다.


한창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화제작 [더 글로리]에서 김은숙 작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인물은 주인공들이 아닌, 바로 배우 엄혜란씨가 맡았던 '현남'씨 였다.

극본을 쓸 때부터 현남 씨를 연기할 사람은 배우 엄혜란 씨로 콕 집어 놓았다고 한다.

작가는 왜 이야기 속에서 그토록 '현남' 역을 중요하게 여겼을까 생각해보니, 작중 현남 씨는 완전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으로부터 반복되는 가정 폭력으로 인해 현남씨는 아프고 힘들었지만, 그녀는 웃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픔은 아픔이고, 웃긴 순간에는 웃어야 했다.

주인공 '동은'이는 현남씨와 함께 손을 잡고 복수를 시작한다.

긴 세월 복수를 위해 뚜벅뚜벅, 무겁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어 온 동은이는 부러 웃지 않는다.

웃으면 자신이 왜 복수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복수의 동기를 잊게 될까 무서워 웃음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그런 동은이 앞에서 현남씨가 어린 아이처럼 소리내어 웃는다. 동은은 깜짝 놀라 현남씨를 빤히 쳐다본다.

동은의 시선에 현남 씨는 대뜸, 조금 늦은 자기 소개를 한다.

"난 매 맞지만 명랑한 년이에요."


학교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명확히 나뉜 주인공 동은이와 5인방 연진, 사라, 재준, 혜정, 명오 양극 사이에 형성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명랑함을 지닌 현남씨가 등장한다.

완전한 피해자도 아닌, 완전한 가해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다.

자칫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피해자와 가해자 라는 이분법으로 쉽사리 나누어 버리기 전에 작가는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두 가지의 특성이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폭력을 당하지만 명랑한 사람' 으로.

최고의 반전 매력을 지닌 현남씨를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로 나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본다면 어떨까.

'나약하지만 끈질긴'

'아프지만 건강한'

'궁핍하지만 활짝 웃는'

'흔들리지만 뚝심 있는'

'외롭지만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인생과 이미 익숙해져서일까,

모순이 이리 많은데도 꽤 재밌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어서 화장을 고치고 가발을 바꾸어 써야 한다.

쇼타임이 이미 시작 되었다.

비련의 여주인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여기 쓸데없이 환한 여자 한 명이 서 있다.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재밌게 하는지 들어봐야 겠다.

몹시 궁금하다,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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