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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애리 Dec 25. 2020

재수 없는 집

8.엄마는 왜 우리 집에만 오면 청소를 할까?



“아, 차가워!”

엄마의 비명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전 4시 반. 깜깜한 새벽이었다.

불을 켜고 방안을 확인해보니 엄마의 머리가 젖어있었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 그리고 그 옆에서 여동생이 나와 같은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엄마 왜 젖어있어?”

“자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서...”

“어디서 물이 쏟아졌다고?”

“하늘. 아니 천장...”

하늘에서 물이 쏟아졌다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서울 살이 7년 차.

동생과 함께 오피스텔 원룸에 살고 있을 때였다.

제주도에서 살고 있던 엄마가 우리 집에 며칠 있겠다며 올라와 있던 참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엄마와 여동생은 바닥에 요를 깔고 내일 아침 뭐 먹을지 얘기하다가 잠이 든 것 같은데 이게 무슨 일이람.

엄마가 덮고 있던 이불과 베개는 흠뻑 젖어있었고 바닥에는 물이 흥건했다.

천장을 살펴보니 엇?

진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잖아!


천장에는 오피스텔 안내 방송용 스피커가 매립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물이 새고 있었다.

당장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테고 물에 빠진 생쥐, 아니 엄마는 새벽부터 샤워를 해야 했다.

걸레로 물을 닦아내고 세수 대야 위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불현듯 멍 때리고 있는 엄마와 동생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서울 한복판에서, 게다가 지은 지 얼마 안 된 나름 삐까번쩍한 오피스텔에서 새벽에 물벼락 맞아 잠을 설친 엄마의 모습이 웃겼다.      


“엄마, 언니 잠 못 자서 미쳤나 봐. 갑자기 왜 웃어?”

“아니 생각해보니 웃기잖아. 똑같이 바닥에서 잤는데 너는 하나도 안 젖었잖아. 이 넓은 바닥 중에 왜 하필 엄마 얼굴 위로 쏟아졌을까?”

“다신 너희 집에 안 올래. 비싼 집세 내줬더니 물벼락이나 맞고.”   


새벽 4시 반에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 얼굴에 맞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왜 하필 엄마의 얼굴이었을까.     

       


다음 날, 우리는 이사를 가야 했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관리사무실에 전화를 걸었고 관리소장은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며 방으로 올라왔다.

동영상으로 찍어 두길 잘했지.

하긴 밤중에 천장에서 물이 샜다고 하면 누가 믿어줄까.       

하필이면 내가 살고 있던 방이 오피스텔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원인은 옥상에 고여 있던 물이 새서 스피커를 타고 방 안으로 흘러들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관리소장은 정확한 누수의 위치를 찾을 수 없어 당장 공사가 힘드니 이사를 권유했다.

아니 강요가 맞겠다.

매번 비 올 때마다 자다가 물벼락 맞을 순 없지 않겠냐며, 아가씨가 재수 없게 그 방에 당첨됐다고 말했다.

덧붙여, 본인에게도 귀찮은 일이 생겼다고.


그렇지만 오늘 당장 이사라니요.

결국 오늘 밤에도 물벼락 맞는 게 두려워 7층에 비어 있는 방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오피스텔이라 방마다 에어컨, 세탁기, 냉장고, 가구 등이 구비되어 있어서 이사라고 해봤자 우리 짐은 침대와 옷, 신발, 식기류, 엄마가 가져온 몇 가지 반찬이 전부였다.

주말도 아니라 여동생과 나는 출근을 해야 했고 엄마 혼자 이사를 마무리해야 했다.

 

“엄마, 청소하지 마. 우리가 퇴근하고 와서 쓰기 편하게 정리할 게. 짐이나 잘 옮기는지 봐 줘.”

“알겠어. 집 걱정은 말고 조심히 다녀와.”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마. 알겠지? 그냥 쉬고 있어. 빨리 퇴근하고 올게.”

“알겠다니까. 늦겠다. 빨리 가.”


이렇게 두세 번 말하고 가도 엄마는 우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순간부터 걸레질을 시작할 것이다.

안 봐도 뻔하다.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원래 내 집으로 들어온 듯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모델하우스에 구경 와 있는 듯 엄마는 쓸고 닦고 짐 정리까지 완벽히 해 놨다.


“아 엄마! 하지 말라니까!”

“아무것도 안 했어. 먼지가 눈에 보여서 그냥 걸레질 만 한 거야.”


청소하고 정리한 게 큰 죄인 양, 엄마는 내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변명하기 바빴다.


“화장실도 새 집처럼 청소했고, 문틈까지 다 닦았구나?!”

“아니야. 이 집이 원래 깨끗한 편이었어.”

“거짓말하고 있네. 엄마 이럴 거면 앞으로 서울 오지 마!”


그냥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말 한마디만 하면 될 것을 그 말이 안 나왔다.



며칠 뒤, 느닷없이 화장실 문이 잠겨버렸다.

인터폰으로 관리소장에게 비상 열쇠가 있는지 물어봤을 뿐인데 이 양반, 열쇠 들고 와서는 대뜸 시비를 거는 게 아닌가.


“어머니 되시죠? 여기 같이 살아요?”

“아뇨. 며칠 딸네 집에 와 있는 건데...”

“이거 아줌마가 고장 낸 거 아니에요?”

“전 오늘 화장실 쓴 적이 없는데...”

“없긴 뭐가 없어. 안 봐도 뻔하지. 아줌마. 조심 좀 하세요. 사람 오라 가라. 에잇.”


화장실 문이 잠긴 게 왜 엄마 탓일까.

설령 엄마가 깜빡하고 잠그고 나왔다고 해도 이렇게 타박 들을 일이 아닌데.

1층에서 7층까지 열쇠 들고 올라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저기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뭐요?!”

“엄마가 쓴 적 없다잖아요. 엄마한테 사과하세요. 그리고 제가 당장 열쇠 갖고 올라와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이 아가씨 보소. 어떻게 교육시켰길래. 어른이 직접 들고 올라왔으면 고마워해야지 버르장머리 없이. 아가씨! 당장 짐 빼서 나가요!”

“짐을 빼? 저 계약 기간 남은 거 알죠? 이 오피스텔이 관리소장님 것도 아니면서. 나가드리죠. 그전에 지금 주인하고 바로 통화하죠. 당장 제 집에서 나가주세요.”         

    

따지고 들자면 나는 계약서를 쓰고 이 집에 들어왔고 이사 날짜는 한 참 남아있었다.

비싼 관리비도 매달 꼬박꼬박 냈는데 갑자기 나가라 마라 하니 나도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죄송합니다. 화 푸세요. 제가 모르고 잠갔나 봐요. 내려가서 일 보세요.”

“에잇, 어머니 때문에 내려갑니다. 젊은 아가씨가 그러면 못써요. 내가 참아야지 원.”


갑자기 내 뒤에서 엄마가 사과를 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관리소장은 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펑펑 울며 엄마에게 화풀이를 했다.


“왜 엄마가 사과해!!!!!!!!!!”

“누가 사과하면 어때. 그냥 네가 좀 참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딨어. 울지 마.”

“엄마 탓이라고 하는데 그럼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어? 당장 이사 갈래.”  

           


천장에서 물이 세거나 화장실 문이 잠긴 건 누구의 탓이 아니다.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

나는 더 이상 재수가 없는 집에서 살기가 싫어졌다.

곧바로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사를 통보했고 설움과 홧김에 오피스텔보다 3배 비싼 집을 계약해버렸다.  

    

“봐, 엄마. 내가 청소하지 말랬지. 괜히 깨끗하게 청소만 해주고 나가네.”


메리크리스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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