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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애리 Dec 21. 2020

우리 집에 119가 왔다

7.엄마도 가끔 사고를 친다



“집엔 잘 도착했어? 비행기 지연되진 않았고?”

“그럼. 근데 나 할 말 있어. 너 화내지 않는다고 약속해.”

“뭔데?”  

엄마가 제주도에 잘 내려갔는지 안부 전화한 참이었다.

엄마는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꺼냈다.

“화내지 않겠다고 하면 말할게.”

“일단 들어보고. 빨리 말해봐.”

엄마는 꽤나 오래 뜸 들이다가 내가 답답해서 숨넘어가기 직전,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희 집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 바꿔야 해.”

“왜?”

“아까 낮에 집에 119 대원들 왔었어.”

점점 대화가 스무고개처럼 이어져 나갔다.


“119? 내가 알고 있는 소방서 119?

우리 집에 119 대원들이 왜 와?”

“너 진짜 화내면 안 돼.”

이쯤 되면 내가 화낼 만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우리 집에 119 대원들이 올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엄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공항 가기 전에 한 시간 정도 남아서 소파에 앉아있는데 거실 창문이 너무 더러운 거야.

계속 신경 쓰여서 얼른 유리창 청소나 하고 가야지 해서 닦다가 잠겼어. 문이.”

“뭐라고?”

“난 너희 집 창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줄 몰랐지. 우리 집처럼 닫혀도 그냥 다시 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안 열리더라고.

주머니에 핸드폰도 없고 창틀에 매달려 있었는데 마침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보이더라? 도와달라고 소리쳤지. 현관 비밀번호 알려주고 들어와서 창문 좀 열어달라고 했는데 현관문이 계속 안 열린다는 거야.

그래서 119에 대신 신고해달라고 했어.”

“거기에 어떻게 매달려 있었어?

아무리 실외기가 있어도 여기 4층이야!

밖으로 나가서 청소는 왜 해!!!!”

엄마는 119가 오기 전까지 무려 30분 동안 창문틀에 매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 119 대원들이 사다리차 끌고 와서 구해줬어?”

“아니. 현관문 비밀번호 알려주니까 문 열고 들어와서 창문 열어주더라고.”

“바쁜 분들한테 그게 무슨 민폐야? 그분들도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

“청소하다가 갇혔다고 자초지종 설명하니까 웃으면서 앞으로 조심하라고 한 다음 가셨지.

근데 내가 큰소리로 현관문 비밀번호 말해서

아마 이 동네 사람들 다 알걸?

그래서 바꿔 두라고 하려고 말하는 거야.”

“그럼, 평생 말 안 하려고 했어?”  

“응. 말하면 혼날 게 뻔한데. 근데 너희 집 비밀번호 바꾸라고 말할 다른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내일 옆 집 가서 대신 인사 좀 드려.

119에 신고해준 사람이 옆집에 산다고 하더라고. 아까는 내가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고맙다고 말도 못 했거든.”      



아, 우리 엄마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야 했을까.

귀찮은데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야 해서?

아니면, 엄마가 시키지도 않은 창문 청소를 해서?

아니면, 우리 집에 119 대원들이 와서?

그것도 아니면, 데면데면한 옆집에 찾아가 인사하게 만들어서?

전부 아니었다. 물론 놀라긴 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화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가 창문에 매달려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위험했던 순간에 내가 없었고, 그런 위험한 일을 겪었는데도 그저 딸이 화낼까 봐 눈치 보며 말하는 엄마에게 미안하고 화가 났다.



엄마는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먼저 선수를 쳤다.

“앞으로 너희 집 가서 절대 창문 청소 안 할게. 네가 해달라고 해도 안 해. 안 할 거야.”

“...... 떨어지면 게 할 뻔했어.”   

엄마에게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었고,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그나저나

보통 이런 사고는 아들, 딸이 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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