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감,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6.
남주 작가와는 2주에 한 번씩 줌 미팅을 통해 전시의 기간, 제목과 방향성, 구성, 설치, 그리고 그간 해 보고 싶었던 것들, 전시를 통해 우리가 얻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주 작가는 주로 작업하는 유화와 함께 석판화(Lithografie) 작업을 병행하고 싶어 했다. 석판화는 매번 무겁고 두꺼운 돌을 갈아내야 하는 높은 강도의 육체노동이 동반된다. 또한, 돌이 잉크를 얼마나 흡수하느냐는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기술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디지털화와 기계화로 인해 점차 쓰임새가 줄어들고 있는 기술이기에 더욱 시도해 보고 싶은 작업이라고 남주 작가는 말했다. 동시에 기존의 유화 작업들도 전시하고 싶어 했으며, 당장 어떤 작업을 가지고 올지는 고민 중이라고 했다.
그의 그림은 소재를 다양한 곳에서 끌어오는 편인데, 작업실 앞을 흐르는 엘베강, 작센의 울창한 숲속, 그리고 한국 여행 중 우연히 접한 오래된 사진 속 인물들과 정물 등을 그리곤 했다. 그는 특히 소재가 가진 형태를 더듬어 가며, 동시에 옅은 어둠도 빛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의 어스름한 밝은 그림자를 찾는 행위 그 자체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떤 그림이 되었든 전시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나의 경우에는 아주 가까이서 바라본 남겨진 음식물의 잔해라든가 껍데기 혹은 껍질들이 첫 소재가 되었기 때문에, 밝고 선명한 색감들이 화면을 채우게 되었다. 분홍색 껍데기를 재현하다가 그것을 부수는 일련의 과정은 내게 있어 살(flesh)의 의미가 되었고, 엉겨 붙다가 흩어지기도 하는 힘은 한국화의 풍경과 같은 굴곡을 만들어 냈다. 그러한 너울거리는 형상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많은 매력적인 이미지들과 그것들의 색채로 겹쳐졌다.
이내 남겨진 것들과 일상의 결합은 그다음 단계인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다. 어느새 작업은 각각 프랑스와 미국의 글을 쓰는 친구들, 독일의 미디어 아티스트, 그리고 음악가와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주변의 반영과 확장을 통한 실험을 하나의 시리즈로 꾸려 나가는 것이다. 끊어진 새로운 식물의 한 조각이 물과 바람, 햇살이라는 삼박자와 함께 다시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그림과 생각은 또 다른 세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7.
제목은 어떤 걸로 할까? 각자에게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주 작가가 넌지시 아껴온 "픽션들(Fictions)"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나 또한 "픽션들"이라는 어감이 너무 좋았다. 짧고 단순하며 무엇보다도 내가 애정하는 보르헤스의 단편소설집 "픽션들(Ficciones)**"과 같은 제목이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물론 우리가 전시를 그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서, 혹은 그 속의 어떤 알레고리를 추출해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가상의 작업 세계를 만들어내는 두 명의 페인터가 서로 다른 시각과 접근 방법으로 우리만의 "픽션들"을 어떤 방향으로 발전시킬 것이냐는 충분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남주 작가와 내가 "픽션들"이라는 제목 아래 어떠한 내용적, 구조적 실험을 하게 될지 무척 기대되었다.
포스터 이미지 = 이남주, 김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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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판화(Lithography): 석판화는 기름과 물이 섞이지 않는 성질을 이용한 평판 인쇄 기법으로, 18세기 말 독일에서 발명되었다. 석판 위에 기름성 잉크로 그림을 그리고, 물과 잉크의 반발 작용을 통해 이미지를 인쇄한다.
**픽션들(Ficciones):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집으로, 1944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집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독창적인 서사로 유명하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철학적 주제와 메타픽션적 요소가 담겨 있으며, 상상 속 도서관, 무한의 책, 가상의 세계 등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