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육아. "할껄병"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by 마흔아빠

비교적 체력이 남아있었고, 재력도 든든해지기 시작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

그 시절에 친구들 사이에서 팬데믹처럼 퍼진 질병이 있었다.

이른바 '그럴바엔 병'. (aka. 그돈씨 병..ㅋ)


진단 방법은 간단하다.

친구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술한잔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보면 바로 증상이 나타난다.

특수한 누군가만 걸려있는게 아니라, 그 시절 우리는 누구랄것없이 이 병에 감염되어있었다.


차를 사고 싶다는 친구가 하나 있다.

첫 차고 장롱면허였기에 조그만 경차를 중고로 하나 뽑아서 돌아다닐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럼 옆에있던 녀석 하나가 거든다.

"야 그럴바엔 돈 좀 보태서 소형차를 하나 사"

그 옆에 있던 다른 놈도 끼어든다.

"소형차에 옵션 붙으면 그게 그거야. 그럴 바엔 소나타를 뽑아"

갑자기 다른 녀석도 한술 거든다.

"소나타 풀체인지 되면 개구려진대. 얼마전에 페리된 그랜저 진짜 잘나왔더라.

그럴바엔 그랜저를 사서 오래타고다녀"

"야 그럴바엔 거기에 조금더 보태서...."


.....이 질병은 항상 같은 패턴이다.

사회 초년생을 위한 저렴한 중고 경차로 시작된 이야기가 어느샌가 보면 라 페라리가 되어있다.

이 병은 약도 없고, 그저 시간이 약이다.

할부금은 커녕 계약금 걸기도 쉽지 않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 다들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이 그럴바엔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기나긴 잠복기를 거쳐 또 다른 질병으로 튀어나온다.

아이가 생기고 신생아가 집에 들어오는 순간 모든 부모가 걸리는 이른바 "그때할껄 병"이다.

아 그때 이거 할껄, 아 진작 거기 가볼껄, 아 그거 먹어볼껄, 아 많이 자둘껄...

아기가 가져오는 삶의 변화에 대응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처절한 현대를 살아가는 부모들의 절규에 가까운 이 질병은 둘째라고 해서 달라지진 않았다.


조리원 시절, 분명 집에 아이와 돌아가면 새벽 수유로 탈탈 털릴 걸 알면서도

"그러니까 지금 놀아야해"

라는 합리화를 들이대며 눈이 벌게져라 OTT의 숲을 밤늦도록 헤메고 다녔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오는 순간 여지없이 "좀 자둘껄" 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가장 다스리기 힘든것이 자기 마음이고 자기 욕심인 것을.

그게 안되서 머리깎고 산속으로 들어가시는 분들이 있는 마당에,

하물며 속세에 찌든 현대 직장인들에게 자기 마음을 완벽히 조절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괜히 피곤한 마음에 "할껄" 병에 파묻혀 그 악화 단계인 "내가 왜그랬지" 로 넘어가지 않게만 조심하자.

명심하자. 우리는 모두 매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 순간만큼은 만족스러웠다.

명심하자. 과거의 내가 미련했던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너무 힘들어 사고가 비관적으로 흐르고 있는것임을.


그게 아닌것 같은데? 라는 기분이 들지 모르겠지만, 기분탓이다. 기분탓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어깨엔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같은 큰애 하나, 꼬물이 아기가 매달려있다.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기엔 내딛어야 할 걸음이 무겁다.


내가 알고있는 "할껄"병의 치료제는 딱 한가지.

할껄 할껄 할껄 생각들이 몰려올때 그저 "껄껄" 웃고 '그래 잘했다' 라고 스스로 한마디 해주는 것이다.

명심하자 "할껄" 병에는 반드시 "껄껄" 웃어 넘기는게 필수다.

(아놔 아재 개그 라고 속으로 되뇌이는 당신. 어쩌겠는가. 인정하자. 우리는 40대고, 우리는 이제 아재다. 촤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