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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연 May 17. 2024

음식 단상(斷想)

수박, 가운데만 쏙 파먹는 당신

혹시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

수정처럼 맑은 네모난 얼음 위에 뾰족하고 예리한 바늘 끝을 갖다 대고 작은 망치로 톡톡 두들 깨던

얼음을?

그러면, 각기 다른 모양으로 조각난 얼음들이 커다란 양푼 안에 토독 투둑 떨어져 내리고 크리스탈 가루 같은 설탕을 양껏 퍼 넣어 수저로 자그락자그락 저어 녹여낸다.

그러고 나서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잘 익은 수박을 커다란 식칼을 대 반으로 쩍 가른다.

(이때 수박 어느 곳엔가는 삼각뿔의 맛보기 조각 구멍이 꼭 뚫려 있었다.)

동그랗게 흰 띠를 두른 새빨간 수박의 속살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나고,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아이들의 강렬한 눈빛 속에 숟가락으로 수욱 수욱 퍼올려지는 수박조각들.

그 아삭하고 달콤한 조각들을, 설탕 얼음 속에 무심히 툭툭 떠 넣으면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얼음 수박화채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 아이들은 그 시원한 맛과 달콤한 감성을 상상도 못 하리라.


어느 해 여름인가, 아이들이 어릴 적이었다.

냉장고에서 꺼낸 수박을 보자 어릴 때의 그 추억이 생각난 나는 냉동실 사각얼음을 스텐볼에 우르르 쏟아 넣고 설탕을 잔뜩 부었다.

그러자 두 눈이 동그래지던 아이들.

우유에 꿀을 넣고 얼음과 수박을 넣은 게 아니고

그냥 맹물 얼음과 설탕?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엄마가 다섯 살 때즈음 할머니가 해주셨던 얼음설탕 수박화채를 한번 만들어 보려고. 하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꺼내둔 수박을 반으로 잘랐다.

그런데, 어느새 옆으로 온 남편이 대뜸 숟가락을 들더니 수박의 한가운데를 수욱 파서제 입에 쑥 집어넣는 게 아닌가!


뭐 하는 거야, 어쩜 그래?라고 하자

가운데가 제일 맛있단다.

세상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입 안에 든 수박을 우적우적 씹으며 싱글거리는 남편의 얼굴이 참으로 밉살맞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날의 수박화채는 꽝이었다.

어릴 때처럼 찡하게 시원하지도 짜하게 달지도 않은, 무언가 빠진 듯 달고도 싱거운 그저 그런 설탕얼음물 수박채였다.

당신이, 가장 맛있는 부분만 퍼먹어서 그래!

라며 남편에게 핀잔을 준후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제법 자라 이제는 1인분의 양을 거뜬히 넘기는 나이가 됐다. 그리고 수박은 그때에 비해 퍽 비싸졌다.

남편은 나이를 먹었고, 아이들은 바쁘고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이제는 수박을 사 오면 둘러앉아 같이 먹기보다 깍둑설기나 스틱 썰기를 해서 용기에 담아놓으면 각자 덜어들 가서 제 방에서 먹는다.

왜, 가운데만 쏙 파먹어! 하며 핀잔을 주던 아내도

가운데가 제일 맛있어. 하며 능청맞게 웃던 남편과, 그런 아빠를 따라 숟가락을 들고 덤비던 아이들도 없다. 어쩐지 그때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앞으로는 수박을 잘라놓지 말아 볼까?

아무리 바빠도 수박 먹을 때는 다 같이 모여 먹자고 제안해 볼까?


수박의 한가운데만 쏙 파먹던 당신, 어쩌면 당신은 자기 입만 아는 이기적인 밉상이었던 것이 아니라

둥그런 수박 안에 아이들의 숟가락과 자그락자그락  부딪히며 웃고 싶었던 장난꾸러기가 아니었을까?


오늘, 수박을 먹기 좋게 조각내어 용기에 담으며 문득, 가운데만 쏙 파먹던 그때의 밉살맞고 능청스럽던 웃음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는다.

시절은 가고 그리움만 남는다더니, 별 게 다 그리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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