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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연 May 16. 2024

음식 단상(斷想)

숙주나물, 그 서글픈 이름의 유래

살아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혹은 시류에 휩쓸려 편견을 갖고 바라보게 되는 대상들이 있다.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즈음

아 그때는 그래서 그랬구나 혹은

아 그게 아니었네? 하며 느끼는 일도 있지만 서글프게도 그 편견들이 굳고 굳어 바로 잡을 기회조차 잊게 되는 경우도 있다.


녹두의 싹을 내어 키운 숙주라는 채소.

그 채소를 삶아 무친 숙주나물은 초등학생들조차도 다 알 정도로 흔한 반찬이다.

하지만, 숙주나물을 만드는 숙주가 녹두의 싹을 내 키운 식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내 주변에도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조선시대의 학자였던 신숙주의 이름을 붙인 나물, 신숙주처럼 잘 변질되는 나물이라고 아는 사람들이 더 많다.

나 역시도, 고등학생 때까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재야학자였던 이용기의『조선무쌍신식 요리제법』, 서울, 라이스트리, 2019, p.145 에도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숙주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세조 님 금ᄯᅢ에 신숙주(申叔舟)가 여섯 신하를 고변(告變) 하야 죽인 고로 미워하야 이나물을 숙주라 한 것이니 이나물을 만두소를너을적에 짓이겨늣는고로 신숙주를 이나물익이듯하자하야서 숙주라 했나니 이 사람이 나라를 위하야 그리하였다 하나 엇지 사람을 죽이고 영화를 구할까 보냐 성인군자는 결단코 아니하나니라


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 한글로 '숙주나물'이라고 부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기록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숙주나물'이라고 언제부터 불렸는지는 정확한 추정이 어렵다. (나무위키)라고 한다.

옛 문헌에서는 숙주를 '두아채(豆芽菜)' 또는 '녹두길음(菉豆長音)'이라 쓰고 있다.

그렇지만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는 신숙주(申叔舟)가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 신하를 고변(告變)하여 죽게 하였기에 백성들이 그를 미워하여 이 나물을 숙주라 이름 붙였다고 나와있다.

세종대왕과 문종의 유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세조, 어린 나이에 무참히 죽어간 단종을 애달파한 많은 사람들이 돌린 미움의 화살이 철혈의 무서운 왕보다는 사육신과 함께 죽지 않은 신숙주를 향해 날아간 것이 아닐까?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뛰어난 능력과  화려한 경력으로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긴 명신이다.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신숙주 본인도 세종대왕이 많이 아낄 정도의 인재였다 한다.

특히 외교능력과 학식이 뛰어난 그는 빼어난 자질과 능력으로 많은 업적을 이뤘다.

폭넓은 해외경험으로 국제적 지식과 안목도 갖고 있었다.

그가 저술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저술된 내용 외에도 9장의 지도를 포함해 시각적 효과를 높여, 조선 전기와 일본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 시대의 한일 관계에서 가장 정확하고 기초적인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많은 업적을 이룬 신숙주였건만, 나라를 생각한 자신의 소신을 선택한 대가가 너무 쓰다.

변질되어 버리는 녹두 나물이 숙주나물 이름이 뒤바뀌어 버린 것.

그의 후손들은 얼마나 치욕스러울까.

실제로 신숙주의 후손들인 고령 신 씨와 계유정난 때 도움을 받은 가문들은 숙주나물을 녹두나물이라 부르고, 며느리나 배우자에게 녹두나물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시장에 가서 녹두나물을 달라고 해서 가게에서 못 알아듣었다거나, 집안에서 '숙주나물'이라고 칭하다 집안 어르신들에게 혼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령 신 씨 집안에서는 제사상에 숙주나물을 올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계유정난 당시 사육신과 뜻을 같이하고 함께 죽지 않았다 하여, 그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에 그 뉘가 잣대를 대야 할까.

왜 유독 신숙주만 이런 치욕스럽고 서글픈 이름으로 남아야 할까.

녹두나물이 잘 변질되어 숙주나물이라면, 고조선을 시작으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잘 썩고 독하고 역한 냄새가 나고 먹면 탈이 나는 식재료들에 붙일 고약한 인사들의 이름은 또 얼마나 많은 것까.


오늘도 나는 한 바구니의 숙주를 삶으며, 제법 요란한 단상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숙주나물이 녹두나물로 바로 불리는 날이 오기를... 아니면 다른 고약한 식재료에도 몹쓸 정치인들의 이름이 붙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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