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중년의 여성분이셨는데 다짜고짜 지금 단식 중인 쌍용자동차 사람들을 어디가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쌍용자동차 정문으로 가시면 된다고 대답했더니 그분은 다시 쌍용자동차가 어디에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본인이 있는 곳은 부산이고 오늘 서울을 갈 예정이기에 올라 간 김에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이 아니라 평택으로 오셔야 한다고 말했더니 짐짓 아쉬운 목소리로 “그러면 단식하는 분 나이가 어떻게 되시느냐” “그분에게 자녀들이 있느냐”고 또 묻더니 “아빠가 그렇게 있으면 가족들이 얼마나 힘이 들까” 하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분과 10여분 통화하는 사이 듣게 된 내용은 이랬습니다. 그 분은사는 곳은 부산이고 직접 돈을 벌어 생활해야 하는 주부 가장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는데 자녀들 대학 학자금을 내야 하니 하루를 벌어서 하루를 살아도 빠듯하다고 했습니다.
본인도 아직 전세를 살고 있지만 오랜 투쟁이 끝난 줄 알았던 쌍용자동차에서 아직도 복직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 단식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보니 그분들의 자녀들에게 적지만 용돈이라도 보내주고 싶어 수소문을 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말했습니다. “노동자가 잘 사는 나라가 정말 좋은 나라 아닌가요? 그 오랜 시간 동안 해고자 가족들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까요? 가까이 산다면 매일 찾아가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네요.”
전화를 끊고 나니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했습니다.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가장의 실직과 함께 닥쳐온 가족들의 힘겨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죽음,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시간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머릿속을 한꺼번에 휘몰아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지역을 향해 “함께 살자”고 외쳤고 죽어가는 자신들을 한번이라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달라고 말했습니다. 위험한 송전탑에서, 엄동설한을 온몸으로 맞아야 했던 하늘 꼭대기 굴뚝 위에서 그들이 변함없이 말했던 것은 “함께 살자”였습니다.
벌써 1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회사 측의 복직약속을 믿고 있는 130명의 근로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없었던 일처럼 무심히 그곳을 지나쳤고 그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흔들릴 때도 우리는 짐짓 외면했습니다.
평택에서 비교적 먼 곳에 있는 주부 가장이 내게 전한 메시지는 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괴물 같은 자본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해도 내 가까운 곳에서 가족의 생계를 담보로 거대 자본권력과 싸우고 있는 그들을 향해 따뜻한 위로의 말과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먼 곳에서도 마음을 전하고 있는데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우리 평택은 오히려 외면하며 잊고 사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