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세상에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겪고 있는 힘든 일들은 우리도 이미 겪었거나 혹은 앞으로 겪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남의 불행을 비하하거나 폄훼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이 나의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코 그렇게 쉽게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한동안 가습기 피해자에 관한 뉴스가 연이어 보도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겠지만 그분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합니다. 큰 아이 돌 무렵, 나 역시 가습기에 첨가하는 액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집에 가습기는 필수였지만 물때가 끼는 것이 지저분해 보이던 그때, 첨가물을 섞으면 깨끗해진다는 광고 문구에 속아 아기 잠자리 옆에 치명적인 독을 놓아두고 수시로 섞은 것입니다.
어느 날부턴가 이상하게 아이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이라 감기에 걸렸으리라 생각했는데 하도 낫지 않아 큰 병원에 데려가니 ‘천식’이라며 호흡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청천 벽력같은 말을 들은 나는 아이의 호흡이 어려워질수록 가습기를 더 세게 돌렸습니다. 습도를 높게 만들어주면 호흡이 쉬워질 거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습기가 고장 났고 신혼 때라 다시 구입할 돈이 부족했던 나는 궁여지책으로 방 안에 젖은 빨랫감을 널어놓는 것으로 습도를 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 아이가 아픈데도 가습기를 구입하지 못하는 처지를 원망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한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과 보름 남짓 가습기 첨가물을 사용했음에도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천식이 낫지 않아 주기적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다녀야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만일 조금만 더 오래 사용했다면 내 아이도 더 심각한 병을 앓았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피해자 부모들 사이에서 피켓을 들고 울면서 인터뷰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가습기 피해자들을 볼 때마다 조금은 남다른 느낌으로 보게 됩니다.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없는 상황들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이지요.
얼마 전, 평택항에서 벌어진 20대 청년노동자의 사망소식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따금씩 접하게 되는 청년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때마다 또 하나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군 입대 전 엄마 생활비를 보태주려 했던 아들이 잠시 모기업 제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항상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하던 아이가 한동안 연락이 없더니 어느 날 전화 통화에서 바로 옆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 청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자신도 큰일을 당할 뻔 했다고 전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억눌린 듯 잠겨 있었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지던 기억, 그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누구라도, 특히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나의 일이자 우리들의 일이었습니다. 평택항에서 사망했던 청년을 애도하는 시간, 결코 남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그 일들이 또 다시 떠올라 가슴이 아픕니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 우리들의 일을 언제까지 방관자처럼 지켜만 보아야 할까요.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람다운 세상을 위해 우리 모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