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가끔씩 이력서를 써야할 때가 있습니다. 굳이 이직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따금 다양한 곳에서 이력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 가까운 이웃들조차도 나의 삶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조금이나마 알기 위해서는 정갈하게 정리해 둔 이력서를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일 테니까요.
만일 이직을 생각한다면 내 이력서에는 인사담당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필히 담겨야 합니다. 타인이 나의 삶을 접하는 최초의 경험일 테니 어떻게든 나를 잘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들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그 안에 반드시 담아야겠지요.
행복이나 불행, 기쁨이나 슬픔의 사건들처럼 가슴을 울렁이게 했던 내 삶의 많은 이야기 대신 몇 개의 단어와 건조하고 짧은 문장으로 나를 대신하는 이력서를 볼 때면 참 허무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쭐한 듯 자리를 잡고 있는 그 빛나는 성과들 사이에서 침묵하고 있는 상처들을 꺼내 가만 가만 쓰다듬어 주고 싶어집니다.
문득, 이력서를 처음 써야 했을 때가 기억납니다. 증명사진을 넣고 초등학교부터 이어지는 학력사항을 넣고 나니 더 이상 아무것도 쓸 것이 없어 텅 비어 있던 시절…, 그땐 이력서를 앞에 두면 왜 그리 막막하고 한숨이 나오던지, 그때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내 이력서를 채울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오늘도 어딘가로 보낼 이력서를 정리했습니다. 필요 없는 이력들은 빼고 그 기관에서 필요하다고 여길만한 이력을 한 줄 새롭게 추가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쓸 것이 없어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내 결정에 따라 이력을 넣고 빼는 것이 가능해졌으니 그동안 꽤 많은 시간이 지났구나 싶습니다.
이력서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냥 눈으로 훑고 휴지통에 버리게 될 종이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 안에는 한 사람이 하얗게 지새운 밤들과 눈물과 한숨과 고통의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의 과정을 온전히 마친 후에야 적게 되는 한 줄의 경력, 기나긴 시간을 투자하고 노력해서 남들에게 인정받은 후에야 적을 수 있는 하나의 수상 실적, 숱한 도전과 실패가 이어진 후에야 적게 되는 자격증 한 줄…, 만일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들여다본다면 이력서 속에 담긴 한 사람의 눈물과 인내의 시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학교 정규교육을 조금도 받지 못한 사람, 이탈리아에서 추기경의 하인으로 시중 드는 일을 했던 사람, 전쟁에서 부상당해 팔 하나를 잃어버리고 장애를 가진 채 살아야 했던 사람, 귀국 도중 흑인에게 잡혀 5년간 노예생활을 했던 사람,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로 57세까지 활동했지만 한 번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
58세에 쓴 소설 <돈키호테>로 세상의 명성을 얻게 된 세르반테스가 이력서를 써야 했다면 6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한 줄의 경력을 적어 넣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보다 긴 고통의 시간들이 한 장의 이력서 안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을 위의 문장에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오늘 본 당신의 화려한 이력서 안에는 어떤 아픔이 침묵하고 있는지 문득 엿보고 싶어지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