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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y 22. 2020

그래도 공무원

공무원 회상기 #10

스스로 공직사회를 떠난 전직 공무원의 입장에서 ‘여러분~, 공무원 하세요. 너무 좋아요!’라고 먼저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면 나는 진심으로 그 사람의 합격을 빈다. 절대 ‘이렇게 힘든 거 당신도 한 번 해보세요.’라는 놀부 심보로 그들의 합격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공무원의 가장 큰 장점은 확실한 조직운영의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다름 아닌 법이다. 비록 진상 민원인에게 영혼까지 털리는 주민센터 9급이라도 임용, 승진, 보수, 징계 등 모든 인사관리는 지방공무원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임용권자(인사권자)가 있으나 직원 개개인의 처우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진 않는다. 인사가 언제나 공정할 수는 없지만 작은 회사를 다닌 경험이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기준이 있다는 것 자체가 든든한 울타리였다. 공무원이 되고 나니 변태 같은 사장에게 점심시간마다 자신의 허리가 튼튼해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성희롱적 발언을 듣거나, 백만 원밖에 안 되는 월급에 신혼여행마저 무급휴가로 다녀와야 했던 과거의 내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런 연유로 공무원은 상명하복의 조직임에도 개인이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적극적으로 라인을 타고 구청 내 권력층에 편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며 (물론 민원인은 제외) 내 할 일만 하며 정년까지 가는 사람도 있다. 물론 후자는 한직에 머무르거나 승진이 느려질 수 있다. 직장 내 괴롭힘도 상대적으로 그 빈도가 적다. 상사와의 갈등과 같은 고충이라고 불릴만한 사유가 발생하면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방공무원법에 따르면 공무원은 누구나 인사ㆍ조직ㆍ처우 등 각종 근무조건과 그 밖의 신상문제에 대하여 인사상담이나 고충의 심사를 청구할 수 있으며, 임용권자는 이를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처분이나 대우를 하여서는 안된다. 나는 겁이 많고 눈치도 많이 보는 성격이어서 재직 중에는 고충상담을 한 번도 받지 않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런 제도를 이용하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안정성을 이유로 공무원을 선택한다. 공무원은 형의 선고ㆍ징계 또는 법에서 정하는 사유가 아니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휴직ㆍ강임 또는 면직을 당하지 않는다(1급 공무원 제외).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정한 시대에 무려 법으로 신분을 보장해주다니 정말 좋은 직업이다.  9급 공무원에게 이 안정성은 평범한 삶을 위한 확고한 발판이 되어준다. 잘 나가지는 못해도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일할 수 있다. 외벌이만으로 가계를 꾸려나가기는 버겁지만 맞벌이라면 나쁘지 않다. 경제적으로 모자람 없이 사는 비혼 공무원도 많다. 시작은 미약해도 점차 높아지는 호봉 덕분이다. 월급 밀릴 걱정을 하지 않고 장기적인 재무계획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인간으로의 자립을 보장해준다.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 아쉬웠던 점 중에 하나가 사람이다. 구성원 간의 치열한 경쟁이 없으며 한 조직에서 정년까지 일을 하므로 직원과 직원 간의 관계가 친밀한 것 또한 공무원의 장점이다. 서울시 자치구 당 직원수는 보통 천이삼백 명대로 대규모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대도시보다는 시골 집성촌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디 가나 마찬가지로 공무원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실하고 친근하며 무난한 사람들이 많다. 부서마다 차이는 나지만 전반적으로 가족적이다. 돈도 벌고 평생 가는 친구를 만들 수도 있는 직장이다. 가족을 이루고 일구는 것 또한 장려된다. 육아휴직이 자유로우며 직장어린이집이 청사 내에 있어 아이들과 같이 출근하고 퇴근하는 엄마 아빠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주말에 출근을 해야 할 경우 아이를 데려와서 일을 하는 일 또한 자연스럽다. 나는 자녀가 없지만 아는 직원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출퇴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다.








공무원이 소시민의 워너비 직업이 된 지 오래다. 집에 돈이 많거나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거나 특출 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9급 공무원 공채는 나라가 제공하는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다. 게다가 지금까지 나란 사람의 배경이나 삶과 상관없이 열심히 노력하면 공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취업이 쉽지 않은 대학생에게도 이미 취업을 했지만 좌절만 안겨주는 직장생활에 진력이 난 사람에게도 희망이 된다. 나는 비정규직 계약기간이 만료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애매한 학벌, 어중간한 나이, 별것 없는 스펙에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막막했을 때 공무원이 유일한 답이었다. 9급 공무원이라고 자랑할 것 까지는 없지만 공무원이라고 하면 ‘그만하면 괜찮겠다’라는 소리는 들을 수 있다. 공무원을 하면서 제일 기뻤던 것은 정년보장도 연금도 아니었다. 부모님이 내가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은 보통의 집안에서 공무원이 됐다는 이유만으로도 효자효녀가 될 수 있다.


이미 그만둔 직장의 장점을 늘어놓는 것처럼 허무한 일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후회할까  이런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한번 말하겠다. 공무원은  천직은 아니었지만 월급생활을 계속할 생각이었다면 그만두지 않았을 좋은 직장이다. 높은 경쟁률과 합격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요즘은 나이 제한이 없어 다른 일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공무원이 되는 사람도 많아졌다. 공무원이 된다고 인생이 수월하게 풀리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이 많지않은 사람에게는 꽤 괜찮은 삶을 위한 시작이   있다. 그러니 혹시라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공무원 회상기를 읽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불평과 불만은 배부른 아니 배불렀던  공무원의 한풀이에 불과하다고 여겨주시길.


28살 공무원 시험을 막 준비하던 나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산전수전과 정년퇴직이 아닌 의원면직으로 공무원 생활을 마무리한다는 사실을 모두 기억을 한 채로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더라도 내 대답은 그때와 똑같다. “그래도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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