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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고로호 May 12. 2020

내가 을이었던 이유, 진상 민원인

공무원 회상기 #9

지난 4월 30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구청에서 주말 당직을 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당직실에 한 사람이 불같이 화를 내며 뛰어들었다. 차 번호판이 영치(자동차세 체납 등이 발생한 경우 행정청에서 해당 자동차의 번호판을 분리하여 보관하는 행위)됐다며 당장 풀어놓으라고 난리를 쳤다. 민원접수를 해드릴 수 있으나 업무는 월요일 해당부서에서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자 그는 랜턴용 사각 배터리를 집어 들었다. 이제 곧 부처님오신날이라 오늘 꼭 절에 가야 하니 당장 번호판을 내놓지 않으면 내 얼굴에 그 배터리를 던져버리겠다고 윽박질렀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진상이 있기 마련이다. 관공서에서는 보통 악성 민원이라고 지칭하지만 나는 진상 민원이라는 표현이 더 입에 붙는다. 잘못된 민원처리에 대한 클레임은 당연하며 민원응대가 친절하고 적절했을 경우를 전제하에 진상 민원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다.


어떤 사람을 진상 민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민원실에서 혼잣말로 욕하는 사람? 조금 무섭긴 하지만 특정 인물을 향해 욕을 하는 게 아니라서 진상의 범주에 넣기는 애매하다. 버스 환승해야 하니 빨리 서류를 내놓으라고 짜증 내는 사람? 당황스럽지만 짧고 굵은 짜증 뒤 환승할인을 위해 부리나케 떠나버리므로 진상이라고 부를 새도 없다. 단순히 반말이나 몇 마디 욕을 했다고, 서류를 발급받은 후 수수료가 없으니 외상을 요구한다고 해서 진상 민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쯤은 자주 겪어서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야 한다.









인격모독적 발언 및 욕설이 섞인 폭언으로 상대방에게 정신적 피해를 끼친 경우, 신체적 위해를 가한 경우, 일련의 소동이 다른 민원인들에게 공포를 유발하고 업무처리에 악영향을 준 경우 정도는 돼야 대한민국 관공서에서 진상 민원인이라고 부를 만하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진상 민원의 유형을 정리해봤다.


1. 목적 달성형

민원을 보러 왔는데 요건이 맞지 않을 때 주로 발생한다. 처리가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으면 소리부터 지른다. 관공서 방문 전부터 자기가 원하는 것을 꼭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런 경우 고성과 폭언으로 담당공무원의 정신을 나가게 한 후 본인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2. VIP형

자신은 특별하니 그에 걸맞은 특급대우를 원하는 스타일이다. 이름 석자를 적어달라고 말했다가 성함이라는 존칭을 안 쓰고 이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폭주하는 경우도 봤고 지문을 찍어야 하는데 더러운 손으로 만지지 말라고 본인이 직접 지문을 찍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면 무조건 납작 엎드려 잘못했다고 하는 게 제일 빨리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3.  국가불신형

이미 나라와 공무원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유형. 이런 유형 앞에서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등장부터 말투와 표정으로 직원을 압박하기 때문에 평소라면 하지 않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계가 버벅거려 서류 발급이 지체되는 일이라도 생기면 “니들이 하는 게 그렇지.” “ 머리에 똥만 들어서 책상머리에 앉아서 뭐 하는 거야!”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4. 취객형

한국은 주취자에게 관대한 나라다. 만취상태로 신분증 없이 서류를 떼 달라고 난동을 부리다가 그 자리에서 소주를 병나발 부는 사람이 있어도 제약이 없다. 말이 통하지 않고 한번 자리에 앉으면 집에 가지도 않아서 정말 대하기 어려운 유형이다. 관공서에도 음주측정기 도입이 필요하다.


5. 어쩔 수 없는 형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 어딘가 건강하지 못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서 혼자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는 공격형도 있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사무실을 찾아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 수동형도 있다. 이런 경우는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 밖에 답이 없지만 직접 당하면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괴롭다.


이밖에도 인생이 잘 안 풀릴 때 클럽을 찾듯이 근처 관공서에서 성질을 내며 기분전환을 하는 클럽형, 화창한 날에는 잠적해있다가 온 세상이 비로 촉촉해지면 생존신고를 하기 위해 주민센터를 방문해 소동을 벌이는 날궂이형 등 다양한 진상 민원의 유형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그러하듯 민원인도 예의 바르고 선량한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러나 극소수가 만든 파문은 깊고 넓게 퍼진다. 진상 민원인 앞에서 모든 공무원은 평등하다. 대응능력이 떨어지는 신규들이 더 자주 타깃이 되기는 하지만 베테랑도 진상 앞에서는 별 대책이 없다. 직원들 사이에서 까칠한 고참 7급 주임님 얼굴에 민원인이 서류를 찢어서 던지는 일도 봤고 똑 부러지기로 소문난 복지직 주임님이 진상 민원에게 멱살을 잡히는 일도 목격했다. 다른 과에서 직원이 뺨을 맞는 일도 발길질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나이가 지긋한 동장님 과장님들도 삿대질을 하며 달려드는 사람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불시에 벌어지는 봉변 앞에서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그냥 묵묵히 견디는 일이다. 돌발상황에서 우리를 지켜줄 안전장치는 직원 개인의 위기상황 대처능력뿐이다. 운이 좋다면 용감한 동료들의 만류 정도다.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사무실 전체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야 가능한 일이다. 큰소리가 나면 무조건 공무원이 손해이기 때문에 뺨을 맞아도 발길질을 당해도 가해자에 대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비단 공무원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무시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진상은 어디나 있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본인의 무례하고 공격적인 행동이 용인되리라는 확신, 나아가 고성과 협박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학습을 통해 거리낌 없이 그런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진상은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동체의 합의를 깨고 타인에게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한 확실한 불이익이 있다면 그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다시 몇 년 전 당직실로 돌아가 보자. 상황은 갑작스럽게 해결됐다. 내가 배터리로 얼굴을 얻어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직원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무과에 갔다가 마침 주말출근을 한 직원을 만나서 이 소동에 대한 소식을 전한 것이다. 영치를 푼 그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음료수를 내밀며 내게 사과했다. 일이 잘 풀렸지만 뭔가 개운치 않았다. 운 좋게 영치를 풀어줄 직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그러하듯 그 사람도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그것 봐, 우리나라는 무조건 고함지르면서 난리 치면 안 되는 일이 없어’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지도 모른다. 진상이 계속 진상으로 존재하는데 내가 일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사연이 있을 것이라 여기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안겨주는 자들의 사정까지 일일이 이해하고 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 일은 이제 내가 많은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갖는 동안 겪어야 했던 하나의 에피소드로만 남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초록빛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맘때가 되면 궁금해진다. 다른 사람을 겁박하려던 그 마음에도 부처님의 자비가 환하게 내려앉았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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