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고로호 May 02. 2020

공무원형 인간은 존재하는가

공무원 회상기 #8

어깨와 손목 통증으로 일하는 동안 병원을 자주 다녔다. 한창 물리치료를 받을 때였다. 기계로 내 손목을 마사지해주는 물리치료사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선생님, 이 일 많이 힘드시죠?” 내 적성과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매일같이 치열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물리치료사는 치료와 관계없는 물음에 상냥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이 일이 성격에 맞아요. 사람들이랑 가까이서 이야기 나누는 것도 재밌고 보람도 있구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일이 적성에 맞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거지.” 공무원이란 직업이 성격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할 때마다 아버지가 해준 말이다. 완전히 수긍하긴 어려웠지만 그 말은 효과 좋은 진통제 역할을 했다. ‘나만 힘든 게 아닐 거야. 다들 먹고살려고 노력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었다. 그래서 물리치료사에게 질문을 던졌을 때도 사실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너무 힘들어요. 다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거죠.”라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과 맞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은 힘들다. 하지만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스트레스의 강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면 각자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다고 나처럼 매일 진지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공무원을 그만둬야겠다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버티는데 왜 나만 유독 더 힘들어할까?’ 그 질문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내가 나약해서 그래. 나는 왜 이렇게 약해 빠졌을까?’라는 자책이었다. 오랜 시간 이 물음과 대답을 반복한 후에 내가 놓친 것을 발견했다.  ‘왜 나만 힘들까?’라고 질문하기 전에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요즘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이전에 주목받지 않았던 다양한 활동이 유행하고 있다. MBTI 검사가 그중 하나다. 전문가가 아니므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4가지 선호 지표를 조합하여 사람을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검사이다. 지표는 에너지를 발휘하는 방향에 따라 외향(E)-내향(I), 주목하는 정보의 종류에 따라 감각(S)-직관(N), 의사 결정 방식에 따라 사고(T)-감정(F), 선호하는 방식이 조직화된 것이냐 자발적인 것이냐에 따라 판단(J)-인식(P)으로 분류된다. (이 글에서 나오는 MBTI에 대한 내용은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는 책>을 참고했다)


시간을 두고 여러 번 테스트를 해본 결과 나는 한 번은 ENFP, 세 번은 INFP가 나왔다. 인터넷에 떠도는 약식 테스트라 100%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격유형의 특징을 살펴보고 외향성이 강한 INFP라고 여기고 있다. 한 사람의 모든 특성이 16가지 유형 중 어느 하나와 딱 맞아떨어질 수 없고 결과가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공무원 재직 당시 호기심에 해본 테스트 결과를 보고 건성으로 넘길 수가 없었다. 내가 그동안 왜 힘들었는지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내 유형은 이상적이며 에너지를 자신의 꿈과 비전에 쏟아붓는다. 감정에 예민하고 비논리적이다. 그런 사람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원칙에 의거에서 모든 일을 논리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보수적이고 경직된 조직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 남들보다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보였다.


16가지 성격유형은 다시 크게 전통주의자(SJ형 기질), 경험주의자(SP형 기질), 이상주의자(NF형 기질), 개념주의자(NT형 기질)로 나눌 수 있다. NF형인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충동을 멈출 수 없었다면 반대로 공무원형 인간이라고 부를만한 유형도 있지 않을까? 명칭만 봐도 느낌이 온다. 바로 전통주의자다. 이 유형에는 ESTJ, ISTJ, ESFJ, ISFJ가 있다. 전통주의자가 추구하는 직업 유형은 남에게 봉사하는 일, 막중한 책임과 지배력을 갖는 일, 큰 변화 없는 안정적인 환경, 가능성과 방향성이 명확한 업종, 노력의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나는 주어진 일이라면 어떤 일이든 책임을 다하며 불평 없이 공무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그들은 조직 내의 규칙을 잘 따르고 성실하며 강인했다. 자신의 일과 조직에 헌신적이며 직업이 주는 혜택을 제대로 인지하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재미 삼아 전 동료 몇 사람에게 테스트를 부탁했다. ISTJ 1명, ISFJ 2명, ISTP 1명, ENFP 1명이었다. 그중에서도 ISTJ형으로 나온 사람은 평소에도 어쩜 그렇게 묵묵히 일을 잘하는지 대단하다고 여겼던 직원이었다. 항상 공무원 업무 프로세스를 관찰하고 개선점을 찾아내곤 했다. 특히 전통주의자 중에서도 ISTJ, ESTJ는 공무원에 적합한 유형으로 많이 언급되는데 이 결과를 보고 MBTI 검사를 맹신할 뻔했다.








공무원에 적합한 유형이라고 다 조직생활을 잘하고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개인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모든 유형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섞여 돌아가는 것이 조직이며 그 어떤 사람이라도 그 안에서 다 자신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다.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둔다면 그 수가 너무 많아 나라가 멈출지도 모른다. 직업이란 취미처럼 재밌고 신나는 요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다는 직업도 실제로 그 업에 종사를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직업적 고충이 있다. 천직이라고 여기는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의 모든 것이 나와 맞을 수는 없다.


책에서도 어떤 성격 유형을 가진 사람들이건 모든 종류의 직업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격유형 자체도 고정된 것이 아니며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결점을 보완하면서 자기 성격을 개선해 나가는 게 일반적이라고 한다. 일에 자신을 맞추면서 우리는 감춰졌던 능력을 끌어내고 성장하며 강해진다. 그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나만 해도 공무원이라는 직업 덕분에 현실에 대해 인식하고 사회성과 책임감을 익혔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통해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타고난 성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게 아니라도 괜찮다.


그럼에도 지금 있는 자리가 힘들다면, 그것이 누구나 겪는 밥벌이의 고통을 뛰어넘어 자주 당신의 모든 것을 흔들어댄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볼 시간이다. 심리검사든 독서든 다양한 일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든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내가 어떤 사람인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 다음 선택을 하면 된다. 지금 있는 곳에서 내 장점을 더 개발하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버텨야 하는가? 위험을 감수하고 성격에 부합하는 쪽으로 새로운 직업을 선택할 것인가? 생계나 다른 이유로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에게도 언젠가는 결단을 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어느 쪽이건 그 선택에 따른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싶었다. 새로운 직업을 위한 내 노력은 진행 중이다. 그래서 자신 있고 명쾌하게 내게 맞는 일을 해나가는 것에 대해 단정적으로 정의하기 아직 어렵다. 대신 <나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는 책>에 나온 문구로 대신한다.


“자신에게 맞는 직업은 당신의 삶을 향상시킨다. 그러한 직업은 당신 성격의 가장 주요한 특성을 발달시키기 때문에 개인적인 성취감을 느끼게 한다. 즉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한다는 것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그 일이 자기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일이 내 삶을 향상시키기 바란다. 더불어 다른 존재의 삶을 향상시키기 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프로 회식 탈주범이 되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