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회상기 #7
공무원도 세금으로 월급을 받을 뿐이지 직장인이다. 생계를 위해 싫은 일을 참아내는 것은 직장인의 기본 덕목이다. 억지로 해야 하는 일 목록에 회식이 빠질 수 없다. 주민센터에서는 직원 환송회나 송년회 같은 본래 의미의 회식 외에 동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회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행정감사가 있어도, 체련대회가 있어도, 경로잔치가 있어도, 직원 족구대회가 있어도 ‘자, 수고했으니 한잔 합시다.’라는 말에 크고 작은 회식의 변주가 생긴다.
주민자치위원회나 통장협의회 같은 단체는 동행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단체 야유회나 송년회 모임에 직원들도 참석한다. 처음 단체분들과 한자리에서 회식을 가진 날, 묘한 기시감에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직장인의 회식이 분명한데 마치 명절 때 술 잘 마시고 잘 노는 외갓집에 가서 이모부가 건네주는 소주 한잔 마시고 친척들 앞에서 트로트 한곡을 부르는 기분이었다. 동에서 일하면 통장님이 내 삼촌 같고 주민자치위원회 간사님이 내 이모 같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자리라 더 불편하고, 직원들과의 오붓한 회식이라 더 편하고 그런 차이는 내게 없었다. 왜냐하면 난 회식이라면 그 어떤 자리도 평등하게 마다하고 싶었으니까.
퇴근 후 회식 장소로 가는 평직원들의 다급한 발길을 보라.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외진 자리를 스캔한다. 상석으로 보이는 위치로부터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친한 직원끼리 4인 테이블을 선점하기 위해 애쓴다. 늦게 회식자리에 도착해 동장님과 주민자치위원장님이 포진한 테이블 바로 옆에 앉게 된다면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진다. 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팀장님과 한 테이블이라면 이번 회식은 망했다고 자포자기하고 만다. "우리 구와 동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건배사와 함께 본격적으로 회식이 시작된다.
멀쩡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술에 취해가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술만큼은 강제로 마시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결연한 표정으로 권하는 술잔을 쳐내며 분위기를 해칠만한 위인도 아니다. 공무원에 임용된 지가 벌써 10년 전이니 굳이 따지자면 나도 소주 몇 잔 정도 파도타기 할 용의가 있는 옛날 사람이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잔을 비워야 하는 일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술에 취하면 사람은 실수를 하곤 한다. '어제 팀장님이랑 주임님이랑 만취해서 서로 싸웠잖아. 옆에서 얼마나 집에 가고 싶던지.'라며 다음날 출근해서 전날 회식 때 일어난 일을 되새기고 싶지 않다. 술에 취해야 드러나는 인간 내면의 다양하고도 기이한 모습은 친밀한 사이에서만 보고 싶다. 실수는 단순한 해프닝을 넘어 불미스러운 일로 커질 불씨를 제공하기도 한다. 술을 마시면 예의가 없어지고 남에 인생에 감 놔라 배 놔라 오지랖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내 인생은 옳고 니 인생은 틀렸다.'식의 아무말 대잔치의 강제 청취자가 되는 일도 괴롭다.
사람이라면 술도 마시고 실수도 하고 남의 인생에 참견도 할 수 있지 않은가? 공무원이 무슨 로봇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뭐라 하면 너무 인간미가 없지 않냐고 할 수도 있다. 그래도 끝까지 참기 힘든 한 가지가 있다. 왜 회식의 끝은 항상 노래방이란 말인가? 공무원도 대한민국 국민이니 한민족의 흥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싶다. 시끄러운 장소도 질색인 데다 노래까지 못 부르는 나는 노래방에 갈 때마다 울상이었다. 팀장님의 소울 넘치는 트로트 열창을 들으며 왜 나는 흥의 나라에서 태어났는지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 하며 뜬금없이 국적에 대한 고찰을 했다. 분위기는 깨기 싫어 팔이 아플 정도로 탬버린을 흔들다가 끝도 없이 서비스를 넣어주는 노래방 사장님을 미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가 겪은 공무원의 회식에도 장점이 있었다. 동에 따라 다르지만 그 빈도가 아주 자주는 아니라는 것. 단순히 상사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전체 회식을 강행하는 비민주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그리고 도주의 자유가 어느 정도 인정된다는 점이다. 회식 때 도망갔다고 동장님한테 찍혀서 승진을 못하거나 그런 일은 없다. 신규티를 벗어나면서 나는 프로 회식 탈주범으로 거듭났다. 내가 살길은 탈출뿐이었다.
그럴 거면 애초에 회식에 참가하지 않으면 좋았을 텐데 소심해서 그럴 용기는 내지 못했다. 항상 1차 회식이 끝난 후 기회를 노렸다. 정말 열심히 도망갔다.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다음 날 출근해서 왜 어제 도망갔냐고 하는 상사가 있으면 미소에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죄송해요. 제가 어제 몸이 너무 안 좋았어요옹~.” 하며 회식 탈출의 끝점을 찍어야 한다. 덕분에 공무원 생활하면서 애교까지 늘었다.
술과 실수와 사생활을 나누는 회식이 조직에 꼭 필요한가? 난 아니라고 믿는다. 구청에서 웬만하면 회식을 하지 않는 부서에서 일했다. 회식이 없던 그때가 내 공무원 인생에서 팀워크가 가장 좋았던 시기였다. 시끄러운 고깃집 대신 가성비 좋은 한정식집에서 팀 송년회를 열었고 밥을 먹고 나서는 바로 집으로 해산했다. 물론 주민센터에서는 구청과 다르게 업무 특성상 지역행사와 그에 따른 회식이 필요한 경우가 있지만 최소한의 회식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직에도 개인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처음 임용됐을 때와 의원면직 직전의 회식 분위기도 많이 달랐다. 그럼에도 회식 자체가 많은 직원들에게 부담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같이 술을 마셔야 사람과 사람이 가까워지고 사기가 올라간다고 믿는 회식 사랑꾼들에게 나는 이제 그 자리에 없으니 제발 누가 대신 말 좀 해줬으면 좋겠다. 요즘 직장에서의 수고는 ‘한잔 합시다!’가 아니라 ‘집에 일찍 갑시다!'로 격려받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