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어진 하루의 끝에 선다. 낮 길이가 짧아지니 바빠진 서편하늘은 훌렁 해를 넘기곤 급히 달을 띄운다.불쑥 떠나 온 하루 곁을 벌써 기억이 버티고 선다.
잔물결 위로 새 한 마리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미끄러진다. 흡사 착륙하는 동체의 모습 같다. 가을도 기우는 호숫가, 수몰 때 잠긴 나무들이 용케 견뎌 물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수면 위에 데칼코마니를 만든다.
은행나무는 벌써 옷을 다 벗고 겨울채비에 들어갔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세월을 낚는 낚시꾼을 햇살이 끌어안는다. 잔물결에 몸을 비비던 청둥오리 떼가 파스텔톤 방갈로 지붕 위로 날아올랐고 깃털은 은갈색으로 빛났으며 호수는 더욱 반짝거렸다.
베이지색 스웨터를 입은 소녀가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바닥에 엎드린 자세로 카메라의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소녀가 일어섰을 땐 손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지나는 사람 몇이 흘깃 바라본다. 앳된 얼굴에 홍조 띤 모습이 르느와르의 그림 속 소녀 같다고 생각했다.
기억 일기장
프라하 노점상ㅡphoto by ㅡ별꽃
이탈리아에서 왔다는 혜란이는 얇은 옷차림에 발목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깡총한 바지를 입고 추워서 덜덜 떤다.
첫날부터 "언니, 언니" 살갑게 구는데 도통 나이 가늠이 안되던 그녀는 놀랍게도 열 살이나 아래다. 그녀 배에 핫팩을 붙여주고 양말을 벗어 발에 신겨준다. "언니! 예술하는 분이시죠? 프라하에서도 튈 정도이면 범상치 않은 분 같아요"
"평범한 시민이야."
얼마간의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카를로 다리와 프라하성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장으로 들어선다.
크리스마스마켓ㅡphoto by 별꽃
3년 전 겨울 불쑥 동유럽여행을 떠났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혜란이와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 앞에서 뱅쇼를 마시며 인생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을 기록해둔 일기를 발견한다. 어쩌다 시절이 이리 변했을까.
어쩌면 이상한 나라로 사라져 버린 엘리스처럼 하늘길은 우리에게 영영 이별을 고해버린 걸까.
2020년 4월 모로코의 봄을 보고파 예매해둔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는 날은 상실감마저 들었다. 여행하다 죽으리라 생각했던 꿈들은 소멸이 되었나, 보석 같은 시간은 하릴없이 흐르고 자꾸 급해지는 마음에 조바심마저 들었다.
문득 여행에 대해 새로운 마음이 들었고, 그것이 무엇이던 내감성과 조우해 내면의 나를 발견하고 충만함이 차오른다면 커피 한잔도 여행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현실로 이끌었다.
나만의 여행 생각
합수부에서 바라 본 한강노을ㅡphoto by 별꽃
첫 시작은 라이딩이었다. 안양천을 달려 합수부에 앉아 노을 지는 한강을 바라보거나, 한적한 곳에 앉아 클래식을 듣고, 빵 한 조각 뜯으며 따끈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정말 낭만적인 일이었다.
걸으며 보는 세상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며 보는 눈높이 세상은 판이했다. 좌우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있는 힘껏 페달을 밟을 때 불끈 일어서는 종아리힘줄의 느낌도 너무 근사했다.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졌고 갈 곳도 할 것도 너무 많아졌다.
video by 별꽃
보고자 하는 이에게 보이고, 찾고자 하는 이에게 발견된다는 진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었다. 풍경 좋은 루프탑에서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잔, 호숫가 낙엽, 사찰의 풍경소리, 고즈넉함 속 스님의 염불소리, 바람을 만난 나뭇잎들의 수다...... 반려견과 산책하는 사람,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노부부, 카페의 백색소음, 내 마음과 시선에 부딪히는 모든 것이 여행이었다.
아주 가끔은 버겁고 알 수 없는 블루함이 나를 짓누를 때가 있다. 그런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세상 속으로 스며들 때의 아늑함이 그리워 자꾸 어디론가 떠나는 모양이다.
끊임없이 여행 속으로 나는 나를 이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호수, 블루투스를 통해 들려오는 모차르트 21번의 선율에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모차르트의 기이하게 웃는 웃음소리가 뒤섞였고 하루는 벌써 붉어져 있다. 내 의식은 또 어디론가 나만의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살랑바람이 낙엽 하나를 물고 호수 멀리 데려다준다.
북유럽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혜란이와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 꿈을 접지 않으련다. 어쩌면 우린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어 유럽의 어느 벤치에 앉아 지난 시간을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를 테니까.
photo by 별꽃
나는 끊임없이 여행을 생각하고, 떠나고 시작하고 찾아가고 발견한다. 가끔은 주어진 하루의 시간이 한여름 아이스크림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기도 한다. 삶의 모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돌발적 감정들과의 만남이 가끔 서툴고 피하고만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그 감정에 지배를 받게 될까 봐 산이던 카페던 멀리 여행이던 난 무작정 떠나고 본다. 어쩌면 나약한 내면의 나를 외면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형태이던 여행 이야기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