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추위를 견디고 봄에 새싹을 틔워내 한여름 왕성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아파트 앞 화단의 나무들은 총천연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은행나무, 모과나무, 매실나무, 느티나무, 소나무, 플라타너스 나무 등 주방 창문만 열면 보이는 아파트 뒤켠 공원의 나무들은 30여 년의 시간을 함께하며어김없이 겨울채비에 분주한 모습이다.
나는 그 많은 나무들 중 바람이 몸을 흔들 때마다 특유의 향을 쏟아내는 플라타너스 나무를 무척 좋아한다. 쌉싸래하며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섞여 나는 향이 후욱 폐부속으로 들어올 때의 아늑함이란.
플라타너스 나무
유년시절 고향 동네 어귀에 서 있던 덩치 굵은 나무를 끌어안고 냄새를 맡거나 넓은 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고, 떨어진 방울을 주워 가지런히 흙담장 위에 올려두기도 했다. 반쯤 마른 낙엽에 붓으로 시를 써 보기도 했다. 플라타너스 나무는 뜻 모를 반항심이 내비치는 사춘기를 토닥여 주는 어른 같았다.
향을 맡고 낮잠이라도 드는 날엔 부잣집 귀한 딸이 되어 하얀 커튼이 드리워진 고풍스러운 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빳빳하게 다림질한 하얀 자켓에 까만 치마로 된 교복을 입고 햇살이 쏟아지는 강가에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고, 넓은 마당에서 아이들과 손을 잡고 빙빙 원을 그리며 하루 종일 깔깔거리는 꿈을 꾸었다. 그렇다고 내가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거나 그림 실력이 뛰어난 건 결코 아니다. 아마도 기울어가는 집안의 낯선 풍경을 외면하고 싶었던 일종의 갈망이나 갈증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시절
김장준비
배추 50포기랑 시골에서 육촌 언니가 보내준 가을 무로 지난밤 뚝딱 김장을 해서 몇몇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돌아오는 길이다.
'사라라라락 휘리리릭 스윽 후두두두둑' 소란함에 고개를 들다 나도 모르게 '꺄악' 탄성을 지른다. 그저 지나던 바람이 뭐하느냐 물었을 뿐인데 나무는 온 힘을 다해 가장 성숙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연출하고 있다. 혼자라는 고독을 바람이 알아채고 안아주길 기다렸던 걸까. 떠나버린 낙엽의 허전함을 늦가을 햇살이 꼼꼼히 채워준다.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듣거나, 오드리햅번주연'로마의 휴일'에 푹 빠져보고 싶고. 심연의 블루함을 꺼내 애끓는 목소리의 파두와 섞어 바사삭 부서지는 비스켓 한 조각에 하우스 와인 한잔을 음미하고도 싶다.
낡은 스웨터를 걸치고 혼자 변두리 미술관을 찾아 반 고흐의 그림에 빠져들고도 싶다. 엄마의 죽음을 앞에 둔 어린 유리, 토냐와 유리의 복선을 암시한 발랄라이카 선율,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장편소설로 만든 영화 닥터지바고에 등장하는 자작나무의 쓸쓸함과 라라의 테마 역시 깊은 가을의 상념이다.
빗자루와 플라타너스
종잇장보다도 얇아진 밀물 같은 감정은 계절 탓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가을을 한꺼번에 쓸어 담아도 될 만큼 커다란 파란색 박스와 그위에 얹힌 빗자루가 무심하다. 조바심 난 낙엽은 더 멀리 날아가고 싶고 그 마음을 눈치챈 바람은 있는 힘을 다해 바닥에 누운 낙엽을 흩어주지만 경비원 아저씨의 커다란 빗자루는 야속하기만 하다.
하나, 둘 낙엽을 쏟아낸 후 성근 모습으로 의연히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 세상이 아무리 소란해도 365일 날씨와 기온이 달라도 나무는 변함이 없다. 그저 섭리 따라 사계를 반복하며 등을 기대는 사람들을 안아줄 뿐이다.
빗자루가 쓸고 간 자리에 다시 낙엽이 쌓인다. 긴 코트를 걸치고 머리엔 까만색 베레모를 쓰고 낡은 가죽 배낭을 둘러맨다.
글이 잘 써지는 카페 내 자리가 코로나 여파로 인해 책걸상이 즐비한 학교 교실처럼 바뀌어 낯설어졌다. 다시 내 자리를 찾기 위해 헤매다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유럽의 소도시 같은 비밀스런 장소를 발견했다. 찬바람이 기웃거리기 전에 그곳에서 따끈한 커피 한잔 마시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