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의 봄

누군가에겐 탄식의 강이었겠지만

by stellaㅡ별꽃

게으름이 속삭인다. 핑계가 구름처럼 몽글거린다. 잔꾀가 유혹한다. 안락함을 선택하는 순간 나의 주말은 방구석이다. 붙드는 의식을 밀쳐내고 번개처럼 씻고 새벽밥을 짓는다. 내손은 어느새 세상에서 가장 먼 현관문을 비틀고 있다.

숨죽인 새벽이 밀려가고 매끈하게 빠진 고속도로가 달려든다. 한탄강을 굽어보는 태봉 주차장은 호젓하고 새들의 지저귐은 명랑하다. 우렁차게 행진하는 계곡 물소리, 귓불을 간지럽히는 바람. 태봉교를 바라보며 뉴질랜드 여행길에 만났던 '번지 점프를 하다' 촬영지와 비슷하단 생각을 한다.

걷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아웃도어 일색이다. 해외여행에서도 국내여행에서도 교복처럼 입는 아웃도어. 니트원피스에 미니 부츠를 신고 카메라를 맨 나를 대놓고 촬영하는 남자, 나는 마스크를 눈밑까지 올려 쓴다.


세상이 참 시끄럽다. 알고 싶지도 관심 두고 싶지 않은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악에게 선이 지배당하는 것처럼도 보이는 세상이다.

나는 달려드는 세상에서 벗어나 나만의 퀘렌시아를 찾아 이동한다. 물윗교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담청색 물빛과 바람이 나를 어루만졌고 수억 년의 세월에 깎이고 다듬어진 기암괴석의 고고함에 사로잡힌다. 물결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부교.

그저 바람 부는 대로 순리대로 살다 가면 될 것을 인간은 어찌하여 신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하는 걸까. 때론 인간은 스스로 자멸을 초래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자꾸 반대편 세상으로 도망친다. 인간적이고 온화하며 더디게 흐르는 공간과 시간 속을 유영한다. 소름 돋을 정도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는 세상에 대한 나의 합리적 핑계일지도 모르지.


한탄강은 후삼국시대 후 고구려 궁예가 도망치다 사방에 널린 현무암을 보고 나라가 망하겠구나 한탄했다는데서 유래했다는데 한자로는 큰 여울을 의미한다.


한반도 중서부의 화산지대를 관류하는 강으로 강원도 평강군에서 발원하여 철원군을 거쳐 연천군 전곡읍과 미산면 사이에서 임진강과 합류한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 지질공원으로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분출된 용암이 흘러내려 임진강까지 140km를 흘러내려 생긴 큰 강이라는 설명을 해설사가 덧붙인다.

그저 어느 사진작가의 사진 한 장에 반해 불쑥 나선길인데 아뿔싸! 크고 작은 돌과 바위를 넘나드는 길이 있을 줄 짐작도 못했다. 미끄럽고 발목을 접질리기 십상이다. 평상시 백두대간이나 정맥 길을 걷고 라이딩으로 다져둔 체력과 순발력이 괜한 게 아니었다.

담청색 물에 비친 제 몸에 취한 바위와 먼발치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나무들. 버들강아지 털에 몸을 비빈 참새가 창공으로 포르르 날아오른다. 햇살을 안고 업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물소리를 친구 삼아 걷는 길은 고요하다.

고즈넉함 속에서도 봄날의 수다는 쟁쟁했고 태고의 신비는 하나 둘 내게로 걸어왔다. 사람 얼굴을 한 바위에 자라난 나무는 흡사 젤을 발라 멋 부린 머리털 같다. 바람과 세월에 깎여 만든 주상절리는 단아하다.

고석정의 고고함도 여전하다. 신라 진평왕 때 한탄강 중류에 세워진 정자로 이곳에서 여름에는 작은 유람선을 타기도 한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흡사 거침없이 강을 내달리는 용의 모습 같다. 햇살 좋은 넓적한 바위에 앉아 차를 마신다. 물소리 새소리가 좋다.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돌탑 쌓는 모습과 물수제비를 뜨는 여인들, 작은 돌을 주워 열심히 바위에 붙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진지하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와 온전히 만나는 시간. 오늘은 혼자여서 좋다.

"아이고 그렇게 힘들면 집에서 쉬지 왜 따라 나왔어? 여기는 한번 들어오면 돌아가지도 못한다고. 한쪽으로만 걸어가야 해."

"다리가 아파서 그려. 천천히 가지 왜 그리 닦달을 하누. 아이고 나는 좀 앉았다 가야 쓰겠어."

물 한 방울 없이 나선 두 할머니. 나는 녹차와 과일을 건네고 다시 걷는다. 먼발치로 봄이 급하게 오고 사람들은 그 봄을 머리에 이느라 분주하다.

"사진 찍어드릴게. 누구랑 오셨어?"
"나랑 저랑 왔어요."
"어디서부터?"
"태봉대교에서요."
"아이고 대단하시네. 혼자 8km를 걸으셨다니."

걷는 줄도 모르게 순담계곡까지 걸어왔다. 물 윗길을 종주 한 셈이다. 트레킹족들을 위해 사진봉사를 하는 남자분을 지나 해설사 '구금자'님게 한탄강의 유래와 이런저런 보를 얻는다.


11월부터 4월까지 부교를 띄웠다 걷고 여름엔 래프팅 준비를 하며 겨울엔 한탄강 전체가 얼어붙어 얼음 트레킹을 하는데 가장 권하고 싶은 계절이 겨울이란다. 이야기 끝에 나의 수필집 이야기가 나왔고 인터넷으로 검색하더니 바로 읽고 싶다기에 나는 책 한 권 보내줄 것을 약속한다. 스치는 인연이다.

"강원도라 무척 추울 줄 알고 롱코트까지 걸쳤다 벗었습니다."

"패딩에 바람막이에 겹겹이 옷을 껴입고 오는 사람들을 보면 웃음이 납니다. 철원에도 봄은 옵니다."

누군가에겐 탄식의 강이었을지언정 내의식을 고요히 물들인 아름다운 한탄강, 그 강에 봄이 오고 있다.

#사진ㅡ별꽃(셀카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