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 고향집 뒤뜰 울타리는 노란 매화나무였고 가지런한 장독대 뒤로 감나무, 배나무, 대추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었다. 옻나무와 두릅나무 오동나무도 함께 자랐다.
이른 봄이면 땅에 묻어두었던 바나나 나무가 벌떡 일어나 화단 한가운데를 차지했고, 더덕 줄기는 지붕에 매어둔 줄을 따라 하늘로 향했다. 접시꽃, 모란꽃, 과꽃, 칸나, 달리아, 작약, 밥풀꽃, 코스모스, 봉숭아, 채송화, 분꽃 등 갖가지 꽃들이 사시사철 피어났다.
뒤뜰 한편엔 도라지 밭도 있었는데 병약했던 딸을 위해 더 병약한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꿈의 밭이었다.
오각형 모양 부푼 도라지 꽃망울을 터뜨리며 온갖 즐거운 상상을 하다 보면 뉘엿 해가 저물고 길게 늘어졌던 그림자들이 자취를 감춘다. 유년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별을 닮은 보랏빛 흰빛 도라지꽃을 참 좋아한다,
제멋대로 생긴 붉은 밭 흙을 비집고 나온 마늘이며 상추가 풍요롭고 꾸지나무 뽕나무엔 오디가 탐스럽다. 이따금 들리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전부인 호젓한 시골길, 베어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햇살을 쬔다.
벗들과 산행 후 하산 중이다. 바람의 간지럼을 참지 못한 노란 매화가 몸을 흔든다. 문득 코끝에 매콤한 기운이 돌며 마음을 훑는다. 눈이 촉촉해진 난 친구들과 거리를 두고 걷는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신 병약했던 아버지가 뒤뜰 도라지밭을 유독 아끼셨던 이유가 새삼 가슴에 사무쳤다
오월의 햇살은 저토록 아름다운데 할 수만 있다면 항아리에 햇살을 가득 담아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퍼주고 싶었다. 초록 초록한 이파리, 바람내음, 일렁이는 들꽃, 지붕 위로 솟은 나무와 하늘과 구름까지도.
글의 길목이 막혀버렸다. 단어 하나만 있어도 쏟아지던 글은 휘발되었다. 멀어지는 하루의 끝만 멀건히 바라보는 날도 많아졌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변주곡 같다. 내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과 마주쳐야 할 때가 있다지만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다.
그렇다. 내 아이가 아프다. 꿈이길 바라지만 아니 꿈조차 아니길 바라지만 현실은 아프다는 거다. 삶의 과정 중 넘는 고비란 것도 안다. 잘 넘을 거란 것도 안다. 아니 어쩌면 세상 사람 누군들 아프지 않은 이 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글의 길목이 막힌 게 아니라 혹여 지인들의 불편한 관심과 걱정 같은 위로가 싫어 난 글쓰기를 멈추었나 보다.
누구보다 활발하고 의욕이 넘치던 아이. 정이 너무 많아 챙겨야 할 친구들이 많았던 아이. 거칠 것 없이 달리며 잠재력을 불태웠던 아이. 그러함 속에 정작 자신을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쌓여 내면에서 과부하가 일어난 걸까.
"나이가 들어도 성장통이란 게 있더라. 지금 엄마에게 성장통이라는 건 늙는 두려움이 아니라 자식한테 폐가 되지 않는 가치 있고 건강한 삶을 살고 싶은 소망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곱이 곱이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을 거야. 그깟 것 그냥 죽기 살기로 넘어버리던가 쿨하게 패스해버려. 대신 피하지는 말고 정면으로 부딪혀봤음 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경우가 많더라고
남들보다 늦는다고 불안해하지 말고. 세상은 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야지 남 의식할 필요 없어. 그들의 인생과 아들의 인생은 다른 거잖아. 친구들이 갖지 못한 뛰어난 재능이 있는데 뭘 걱정해. 백세시대 이삼 년쯤 더디 가면 어때. 이번에 생일 때 보니 오!~~ 울 아들 꽤 잘살았던데~~ 연예인인 줄 알았어. 아이스크림 케이크 한 개는 엄마 줄 거지~
친구들한테도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해. 사람보다 귀한 재산은 없는것 같아. 멈추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걸어봤음 해. 무엇이든 하고 있으면 일이 생기지만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 잔소리 아냐ㅎ."
"잔소리 아니라고 하는 거 보니 잔소리 맞네~~ 알겠어요 명심할게 엄니! 고마워요."
라일락 꽃잎 흩날리는 아름다운 봄날을 미처 다 누리지도 못한 채 꽃가마 타고 떠나버린 아버지는 병약한 딸을 걱정하면서도 우리 딸은 잘할 거라 늘 믿어주셨다. 이제야 그 깊은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난 진짜 엄마가 되어가나 보다.
#예산 여행
#사진ㅡ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