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에 바람이 분다. 섬진강 돌비늘을 핥고 온 바람은 다시 대나무통에 몸을 비비고 푸른 잡초밭으로 걸어간다. 문득 템플스테이로 연(緣)이 된 어느 사찰의 보살이 생각났고 세상을 초월한 듯 무덤덤한 그녀와의 시간이 그리웠다.
벽에 걸린 마음을 툭툭 털어 아침햇살 가득한 빨랫줄에 널어둔 후, 세상 더없이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하다 돌아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차를 마시면 세상 번뇌가 다 사라진다.
행자승의 묵직한 중저음이 땅에 꽂히고 맑은 목탁소리가 도량을 돌기 시작하면 승방에 불이 켜지고 놀란 밤은 황급히 몸을 숨긴다. 도량석에 이끌려 사찰 툇마루 끝에 서면 푸른 새벽하늘엔 별만 보일뿐이다.
언젠가 시누이들 시집살이로 속앓이 하는 내게 이런저런 말씀을 같이 나누던 주지스님께서
"다 자네가 잘못했구먼. 왜 참기만 했어. 그러니까 참는 사람인 줄 알고 더 그러지."
호통치듯 깨달음을 얻게 해 준 스님 말씀에 나는 깔깔 웃고 말았다. 이토록 부질없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끌어안고 살았던 걸까.
그런 나는 남들은 6개월, 1년을 벼르고 와도 만남이 어렵다는 주지스님과 우연하게도 두 시간이나 독대를 나누었으니 큰 복을 입은 셈이다.
다 지난 이야기를 들추는 나는 필시 마음에 스크래치가 난 모양이다. 세상일이란 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꼬이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니 어이할꼬. 시간이 업어 가면 그뿐인 것을. 그런 연유로 요즘 들어 곡해와 일방적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상대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오해하고 마음의 빗장을 걸어버리면 아무도 열 수 없는 높은 담장 안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것'
이라는 보살의 목소리가 평온하다 못해 적막감마저 느껴진다.
어차피 이 세상에 홀로 왔으니 남편도 자식도 떠나보낼 때가 되었고, 그녀도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더니 출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섬진강변 마른풀을 쓰다듬던 바람은 대나무 숲으로 가는데, 나는 아무래도 주지스님의 호통을 들으러 템플스테이를 가야 할 모양이다.
#사진. 그림ㅡ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