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칼바람이 살을 에이는 철로 위엔 눈발이 성성한데 기다리는 기차는 연착이란다. 양볼을 비비며 시린발을 달래느라 동동거리는 그녀. 그때 한 청년이 다가왔고 그녀 앞에 무릎 꿇듯주저앉는다.
"춥지. 단추를 채우면 좀 나을 거야."
열려 있던 코트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준 청년은 끼고 있던 가죽장갑을 벗어준다.
"끼고 가. 안 줘도 괜찮아. 딱 맞는 장갑보다 넉넉한 걸 끼면 더 따뜻할 거야."
청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빼에엑" 굉음과 함께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기차는 빨리도 달려온다.그녀도 아쉬웠는지 살짝 뒤를 돌아보곤 빠르게 기차에 몸을 감춘다.철로 앞에 서성이던 청년의 모습과 문산역은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지고 날 선 바람만 휑~할 뿐이다.
코펠과 다섯 명의 청년들
때는 바야흐로봄날~~앞집 순이가 재채기만 해도 뒷집 총각이 실신한다는꽃바람살랑대는 사월이렸다. 친구 영자랑 동생 순이랑 북한산을 가기로 한 날이다. 갓이십대를 넘긴 처자 셋은 마음에 핑크빛 꽃 물감을 바른 듯 살랑대는 봄을 주체하기 힘들 지경이다.
밥을 지어먹자며 영자는 쌀과 김치를 그녀는 코펠과 버너를 가져가기로 약속한다. 올케언니가 해 온 혼수 중 눈독을 들이던 코펠과 버너를 몰래 챙기며 메모를 남긴다.
'언니 흠집 안 내고 잘 쓰고 제자리에 돌려놓을게요.'
산행 초보인 데다 복장도 불량해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아 두 시간쯤 산을 오르다 밥이나 해 먹자며 퍼질러 앉는다. 영자가 김치랑 쌀을 꺼내는 사이 그녀는 코펠을 꺼내는데 갑자기 건너편에 앉아 있던 청년 다섯이 박장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아뿔싸! 코펠과 버너라 생각하고 챙겨 온 것은..... 찬합이었다 ㅋㅎㅎ
계집애처럼 생긴 청년이 다가왔고 밥을 해줄 테니 같이 먹자며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영자는 어느 틈에 청년들 사이에 끼어 까르르 넘어가는 중이었고 동생 순이랑 그녀도 어물쩡 합류를 한다.
"우린 스물세 살이고 K대 3학년에 재학 중입니다.이 친구는 파주에서 양장점을 합니다."
양장점을 한다는 청년은 외모가 수려하니 귀티가 흐르고, 다부진 체구에 키도 훤칠한 데다 목소리도 중저음이었다.그녀보다 한 살 위라며 청년들은 바로 동생 취급을 하며 친숙하게 구는데,
영자는 벌써 계집애 같은 청년과 눈이 맞았는지 여간 나른한 게아니다.
"얘 상형이 진짜 멋있는 친구야. 성실하고 마음 반듯하고 요리도 정말 잘해. 그중 김치 수제비를 기가 막히게 끓이는데 언제 한번 먹으러 와라."
양장점 하는 친구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던 버드나무 청년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참 진수는 8형제 중 막내인데 고시공부 중이고 꿈이 검사야. 태호는 엄청난 부잣집 아들인데 승용차도 있어.맨날 여자 한데 차인다. 좀 밥맛이긴 한데불쌍한 놈이야."
버드나무 청년이야말로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친구들 말이 이어진다.
"야! 그런데 너 아까 찬합을 보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 얼마나 예쁘던지 귀여워 죽는 줄 알았다. "
겨우 나이 한 살 차이에 귀엽느니 마느니 떠들며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놀던 처녀 총각들. 아쉬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