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즈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숙소 옥상에서 그네를 탄다. 계속 꼬이는 장, 앙다문 입술 사이로 터지는 신음, 난 숙소로 뛰어 내려온다. 약 대신 뜨거운 물을 부탁해 컵라면을 먹는다. 무슨 생각인지 컵라면을 스무 개나 가져왔다. 해외여행 중 몸이 아프거나 우울할 때 마시는 컵라면 국물한 모금은 약효가 끝내준다.
호텔 주인은 아픈 나를 위해 기분 전환해준다며 여행객이 많지 않아 숙소가 텅텅 비었다고 마음에 드는 객실을 고르란다. 고맙지만 이도 저도 다 귀찮은 난 잠을 청한다. 몸은 점점 늪으로 빠지다 기절하듯 잠이 든다.
차도로 뛰어들뻔 한 냥이
새벽에 잠이 깨 반신욕을 하고 일찌감치 메디나로 향한다. 비쩍 마른 고양이 한 마리가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려던 찰나 번쩍 안아 골목 깊숙이 넣어준다.
시장에서 만난 머플러 가게 총각(?)에게 기대 없이 물어본 건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온천과 흡사한 곳이 승용차로 30분 거리에 있단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샴푸랑 대충 챙겨 나선다. 스페인의 가을 들녘을 닮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사이프러스 나무로 빼곡히 담장이 둘러쳐진 왕의 농장을 지난다. 무장한 경비병들, 손을 흔드니 그들은 화답한다.
햇살은 투명하고, 추수를 끝낸 들녘은 한가롭다. 황금빛 들녘 아래 코발트 빛 작은 호수, 자작나무가 그 곁을 지키고 말이 풀을 뜯는다. 몽실 구름이 호수에 얼굴을 비치고 바람은 코끝을 간지럽힌다. 뜨거운 여름 뒤에 숨었던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풍경을 놓칠세라 차에서 내려 덤불 속으로 들어가다 가시에 찔리고 만다.
물레야꾸 마을로 가는길 풍경
보기에 여려 보이는 풀이 어찌나 억세고 날카로운지 낫을 꽂아둔 것 같다. 뱀이 나올지 모른다며 천방지축 뛰는 나를 제지하는 서버의 얼굴이 붉어진다.
먹먹해진 고막을 '뻥 '소리가 날 때까지 꼭 누른다. 고도가 높은 모양이다. 구절양장 휘어진 길을 따라 거대한 올리브 농장이 이어진다.
‘당나귀 빨리빨리’
원주민 복장을 한 여인이 당나귀를 타고 가는 장면을 이야기했지만 난 늘 1~2초 사이로 카메라를 만지다 놓쳐버린다. 당나귀 사진에 집착하고 있는 나다.
Moulay yacoub(물래야꾸)라는 온천 마을이다. 고도가 높은 산비탈 아래 오밀조밀 가파르게 형성된 마을은 동화 속 풍경 같다. 주차장을 지키는 당나귀와 소년, 지글지글 화덕에 구워내는 양꼬치 냄새, 40도를 오르내리는한여름 열기와 뒤섞인 연기에 현기증이 솟는다. 늙은 개들은 주차해 둔 차 밑으로 기어든다.
물레야꾸 절벽마을
알록달록 예쁜 집들과 상점이 절벽 아래로 이어지는 벽을 향하여 묶인 당나귀의 얼굴은 우는 듯 웃는 것 같다. 파란 슈트를 입은 소년이 다가와 당나귀를 타보라며 잡아끈다. 얼결에 당나귀 등에 올라탄 난 거의 수직으로 된 계단을 내려가는 통에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고 내려달라 소리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쳐다보며 좋아 죽는다.
힘겹게 계단을 내려가는 당나귀에게 진심 너무 미안해 돈을 다 줄 테니 내려달라는데도 기어코 언덕 아래까지 끌고 가는 소년. 더 태워주겠다며 어서 등에 올라타라는데 이 더위에 당나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진 않았다.
온천에 들어가려면 수영복이 필요하다기에 어차피 여자들만 하는 곳이니 수영복 팬티만 산다.
새로 만들어진 온천은모로코의 자랑이며 미네랄이 풍부하고 건강엔 최고라며 지겹도록 자랑을 늘어놓는다. 언덕을 내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쏘아대는 광선에 몸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벤자민 나무가 정말 예쁘다
온천 마당에 심어진 벤자민 나무 이파리는 기름칠을 한 듯 반질반질 윤기가 흐른다.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로비, 서버는 내게 이것저것 원하는 것을 묻는다. 여자들만 하는 풀장에서 놀다 전신 마사지받는 걸로 예약을 마치고 온천으로 향한다.
설마 남녀 혼탕??
이런 젠장. 프랑스어는 가벼운 인사 정도나 알아듣는 나인데, 자기들은 단 한 명도 영어를 못 한다는 말만 영어로 하고, 모든 대화를 프랑스어로 쏟아 놓는다. 폭풍 불어에 정신이 훅 나간다.뭐래니??
믹스 어쩌고 하는데 얼굴과 몸을 같이 마사지할 거냐 묻는 줄 알고. 에라 모르겠다 ‘오케이’. 이 여자 놀란 표정, ‘정말이지?’ 되묻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쿨하게. ‘오케이'답한다.
눈치로탈의한 후샤워하고 수영복을 갈아입으라는 것까지는 어찌 알아 들었다. 샤워 가운을 벗고 나오라는 말에 수영복 팬티만 걸치고 나가니 이 여자 사색이 되어 나를 탈의실로 다시 밀어 넣는다.
비키니 수영복을 입거나 원피스 수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까지도 알아들었다. 얼결에 속옷 브래지어를 착용하면 안 되냐 물으니 '오 마이 갓' 호들갑을 떤다. 절대 안 된다며 원피스 수영복을 가져와 갈아입으라네.
온천이 보인다
돈을 지불해야 하나 물으니 안 해도 된단다. 이미 반은 넋이 나간 상태로 온천욕 할 준비를 마쳤다. 미로처럼 컴컴한 곳을 가리키며 들어가서 오 분 후에 나오라나 뭐 그러는 것 같다.
일자로 죽 뻗은 곳에 의자 몇 개만 덩그러니 있는 습식 사우나다. 아무도 없다. 뭘 하라는 거야 대체. 팔을 비틀고 온몸을 스트레칭하며 나가야 하나 고민하는데 ‘마담’ 부르는 소리.
따라간다. 헉! 털이 복슬복슬한 남자들만 바글거리는 온천탕, 뻘쭘한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한데, 남자들이 흘끗거리며 ‘Bonjour Madam’ 인사를 건넨다.
나도 들릴 듯 말 듯 ‘Bonjour Meric’ 화답한다. 분명 여자들만 있는 풀장을 원하다고 했는데, 물속에 몇 번 들어갔다 나왔다 하던 난 깊이를 모르고 발을 집어넣는데 순간 몸이 뜨니 어찌할 바를 모르다 계단 난간을 잡고 '아푸 아푸'꼴사납게 빠져나온다.
뙤약볕 아래 당나귀들
도와주고 싶었는지 한 남자가 다가와 저 옆으로 가면 깊지 않다며 지긋이 말을 거는데 번역기가 탈의실에 있으니 참 갑갑하네.
여직원을 부른다. 나는 분명 여자들만 있는 풀장을 예약했다.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 영어로 떠드는데 여직원은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더니 키가 멀대처럼 큰 남자를 데려온다.
그 남자 영어 할 줄 아냐 묻기에 조금 한다 했는데, 영어 할 줄 아냐 물어보고 왜 프랑스어로 물어보는 거야. 서로 답답한 대화가 오가는데 나는 이 풀장이 어떠냐 묻는 줄 알고 ‘Good’ 대답한다. 이 남자 가슴 벅찬 얼굴로 오른손을 주먹 쥐어 왼쪽 가슴을 두드리며 "인샬라 인샬라MerciMadam"이라는데 뭐가 고마운 거지?
갑자기 야릇한 배경음악이 깔리며 대포만 한 카메라를 어깨에 메거나 마이크를 든 예닐곱 명의 남녀가 풀장으로 들어오는데......
물레야꾸 절벽마을 소년들
두서없이 여행기를 쓰고 있습니다. 모로코 여행기 출간을 목표로 세웠지만 게으릅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여행의 순간을 더듬더듬 꺼내봅니다. 갑자기 변해버린 세상, 언제쯤 다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을까요. 문화가 다른 모로코에서 온천욕을 하며 당황스러웠지만 유쾌했던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남녀혼탕이란 표현보다는 남녀 혼풀장이 더 맞을 것 같네요.